브루나이, 석유에 의존해 홀로서다
브루나이, 석유에 의존해 홀로서다
  • 김현민 기자
  • 승인 2024.01.27 15: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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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레이시아연방④…석유 수익금 배분 놓고 이견 연방 가입협상 무산

 

브루나이(Brunei Darussalam)는 보르네오 섬 북쪽에 위치하며, 면적이 5,765으로 경기도의 절반쯤 되고, 인구는 46만명에 불과하다. 이 작은 나라가 보르네오 정글에서 독립국으로 버티는 이유는 석유라는 신의 은총이 내렸기 때문이다.

이 나라의 원유와 가스 생산은 GDP90%를 차지한다. 매일 167,000 배럴의 기름이 솟아나는, 아시아에서 네 번째 산유국이다. 액화천연가스(LNG)는 하루 2,530생산되며, 세계 9위 가스 수출국이다. 1인당 국민소득이 34,000달러를 넘는 부자나라다.

브루나이는 세계에서 몇 안되는 절대군주국이다. 하사날 볼키아(Hassanal Bolkiah) 국왕이 총리를 겸한다. 왕세자가 수석장관이다. 의회는 있긴 하지만 국왕에 자문역할을 하는 역할에 그친다. 1962년 이후 선거를 치른 적이 없고, 의원들은 임명직이다. 이 절대왕정을 굳힌 국왕은 전임 오마르 알리 사이푸딘 3(Omar Ali Saifuddien III, 재위 1950~1967)였다.

 

브루나이 영토 /위키피디아
브루나이 영토 /위키피디아

 

1926년말 메리어트와 코치레인이라는 영국인 지잘탐사요원이 세리아 강가 근처에서 우연히 석유냄새를 맏았다. 두 사람은 지질팀에 보고했다. 1928년 시추에서 기름이 297m까지 치솟았고, 이듬해 두 번째 공구에도 유전이 발견되었다. 당시 브루나이는 영국의 보호령이었으므로, 영국과 네덜란드의 합작사 브루나이셸이 채굴에 들어갔다.

2차 세계대전중인 194112, 일본은 석유를 얻기 위해 브루나이를 침공했다. 태평양전쟁에서 패한 이후 일본은 브루나이 석유를 철저하게 파기하고 떠났다. 1945년 영국이 돌아오면서 브루나이는 다시 영국의 보호를 받게 되었다.

 

1950년 오마르 알리 사이푸딘 3세는 부왕의 장례를 치르고 술탄에 올랐다. 당시 브루나이 인구는 8만명을 갓넘었다. 오마르 알리는 영국이 보호막을 걷어내면 주변의 어느 나라이든 이 석유왕국을 집어삼킬 것이란 강박관념에 빠졌다.

정작 술탄 권위에 대한 도전은 외부가 아니라 내부에서 터져나왔다. 인도네시아 독립전쟁(1945~49)에 참여했던 아자하리(A. M. Azahari, 1928~2002)란 청년이 1952년 브루나이에 들어와 정착했다. 인도네시아 수카르노를 존경하는 아자하리는 정치운동을 벌이다 6개월의 옥고를 치렀다. 풀려난 후 그는 반정부지도자로서의 입지를 굳혔다.

아지하라는 브루네이와 사라와크, 북보르네오를 묶어 연방을 만들고, 브루나이 술탄을 수반에 앉히고 입헌국주국을 채택한다는 구상을 갖고 있었다. 절대왕정을 시도하는 술탄은 헌법을 만들고 의회를 구성하자는 주장이 듣기 싫었고, 사라와크와 북보르네오와 합쳐 석유에서 나오는

이익금을 나누자는 얘기도 동의할수 없었다.

아자하리는 1956년 브루나이인민당(PRB, Partai Rakyat Brunei)를 창당했다. PRB는 북보르네오연방과 입헌군주제를 당강령으로 채택했다. 아자하리의 북보르네오연방론은 싱가포르 주재 영국 총독이 관심을 끌었고, 사라와크와 북보르네오 총독이 동의하며 여론적 지지를 얻어갔다.

19578월 말라야연방이 독립하자 오마르 알리 술탄은 보르네오연방보다는 말라야연방과 밀접한 관계를 맺었다. 아자하리의 브루나이인민당을 견제하려는 속셈이었다. 말라야연방은 입헌군주제를 채택했고, 민주적 절차가 구축되어 있었다. 브루나이 술탄도 민주화를 더 이상 억제할수 없다는 사실을 인식하게 되었다.

19593월 영국과 브루나이 술탄정부는 국방·외교·치안에 대한 권한은 영국이 갖고, 브루나이가 내정의 자치권을 갖는다는 내용에 합의했다. 이 합의에 따라 새 헌법이 공포되고, 2년후인 1961년에 선거를 치르기로 했다. 의회는 33명으로 구성되는데, 이중 과반인 17명은 국왕이 임명하고, 16명이 선출직이었다. 아자하리는 16명의 선출직을 잡기 위한 투쟁에 나섰다.

 

브루나이 유전 /위키피디아
브루나이 유전 /위키피디아

 

그런 와중에 말라야연방의 압둘 라만 총리는 1961527일 싱가포르. 브루나이, 사라와크, 북보르네오를 합친 말레이시아연방 구상을 발표했다. 아자하리의 브루나이인민당은 말레이시아연방 가입보다는 북보르네오연방의 독립이 우선이라고 주장하며, 라만 총리를 식민주의자라고 비난했다. 그러자 라만은 아지하리와 그 정당을 불순분자의 집단이라며 깎아 내렸다.

브루나이 술탄은 오히려 말레이시아연방의 가입을 선언했다. 오마르 알리는 영국군이 빠져나갈 경우 말레이시아가 힘 없는 석유왕국을 지켜주길 기대했다.

말레이시아연방이냐, 북보르네오연방이냐를 놓고 국왕과 브루나이인민당 사이에 충돌이 빚어졌다. 어쨌든 주의회 의원을 뽑는 직접 선거가 1년 미뤄져 19628월에 실시되었다. 이 선거에서 브루나이인민당은 16석을 모두 차지했다. 술탄의 임명직 의원에 의해 과반수는 얻지 못했지만, 아자하리는 국민의 지지를 얻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했기 때문에 정국 주도권을 행사하려 했다.

그는 125일 개회한 의회에 말레이시아연방에 가입하지 않고 보르네오연방을 결성하는 내용의 결의안을 채택할 것을 추진했다. 하지만 술탄이 임명한 의장은 법안 상정을 거부했다. 아자하리는 의회를 통한 정치목표 수단이 좌절되자 폭력에 의한 정부전복을 시도했다. 그는 거사를 일으키면 말라야의 보르네오 진출을 반대하는 인도네시아와 필리핀이 도와줄 것으로 기대했다.

 

무장투쟁은 128일부터 시작되었다. 하지만 반란세력의 힘이 급속하게 약화되었고, 영국군의 개입으로 열흘도 안되어 진압되었다. 인도네시아와 필리핀은 도와주지 않았다. 반란세력에서 8명이 사망하고 1,897명이 체포되었다. 정부전복 계획은 실패했다.

오마르 알리 사이푸딘 술탄은 반역이 진압된 후 말레이시아연방 가입을 서둘렀다. 영국군이 손을 떼더라도 말레이시아가 도와주길 기대했다.

바로 연방가입 협상이 진행되었다. 처음엔 오마르 알리 술탄이 적극적이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협상이 진행되면서 연방에 들어가면서 석유이익금이 축나는 문제에 사로잡혔다. 협상안으로 브루나이가 10년 동안 원유세입을 갖되, 연간 4,000만 링깃을 연방에 납부하는 조건이 제시되었다. 게다가 새로 발견된 유전의 수익금은 연방의 재산으로 양보하는 조건도 포함되었다.

오마르 알리 술탄이 배가 아파하는 도중에 세리아유전 근처에 대규모 유전이 발굴되었다. 연방측은 그건 연방 소유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했고, 술탄은 양보하지 않았다. 결국 이 문제로 브루나이는 말레이시아연방 가입을 지연시켰다. 압둘 라만 총리는 브루나이를 제외한 연방의 설립을 결심하게 되었다. 19639월 말레이시아연방 출범에 브루나이는 끝내 참여하지 않았다.

 

오마르 알리 사이푸딘 3세 전 국왕(왼쪽)과 하사날 볼키아 국왕(오른쪽) /위키피디아
오마르 알리 사이푸딘 3세 전 국왕(왼쪽)과 하사날 볼키아 국왕(오른쪽) /위키피디아

 

오마르 알리 사이푸딘 3세는 1967년 장자 하사날 볼키아에게 왕위를 이양하고 상왕으로 물러났다. 상왕으로 물러나고도 국방장관과 공균참모총장직은 유지했다.

영국의 입장에선 브루나이가 독립하는 게 유리했다. 영국은 브루나이의 군사적 뒷받침을 제공하면서 석유이권을 챙겼다. 198312월에 영국과 브루나이 술탄국은 독립에 관한 협정을 체결하고, 198411일부로 독립했다. 이후 브루나이는 유엔과 아세안에 회원국으로 가입하게 되었다.

이 소국은 국방을 위해 네팔인으로 구성된 구르카(Gurkha) 대대를 보유하고, 영국군의 주둔을 허용하고 있다.

 


<참고자료>

Wikipedia, Brunei 

Wikipedia, History of Brunei 

Wikipedia, Brunei revolt 

동남아시아사, 소병국, 2020, 책과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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