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레이시아사①…조호르 술탄국
말레이시아사①…조호르 술탄국
  • 김현민 기자
  • 승인 2024.01.11 13: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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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라카 술탄의 후예가 포르투갈에 쫓기며 건국…한때 해상무역 지배하며 융성

 

말레이시아의 정치체제는 다른 나라에서 유례를 찾아보기 어려울 정도로 독특하고 복잡하다. 이 나라는 13개 주로 구성된 연방제 국가이며, 3개 연방 직할령을 별도로 두고 있다. 9개 주에는 세습 술탄이 있으며, 이들 9명의 술탄이 돌아가며 국왕을 맡는다. 지리적으로는 말레이 반도와 북부 보르네오로 구분된다.

말레이시아의 독특한 정치체제는 역사적인 산물이다. 말레이시아와 이웃 인도네시아는 인종과 언어, 문화, 역사를 공유했으나 근대 이후 영국과 네덜란드의 식민지배를 받은 것이 두 나라로 갈라지는데 결정적 영향을 미쳤다. 따라서 말레이시아 역사를 별도로 본다면, 1400년경 말라카 술탄국의 형성1511 포르투갈의 말라카 함락에서 출발하는 것이 편리하다. 여기서는 포르투갈에 의해 쫓겨난 말라카 왕족들이 세운 조호르 술탄국에서 말레이시아 역사여행을 출발하기로 하자.

 

조호르주의 위치 /위키피디아
조호르주의 위치 /위키피디아

 

조호르(Johor) 주는 말레이반도 남단에 위치하고 있으며, 해협을 사이에 두고 싱가포르와 마주하고 있다. 면적은 19,166으로 강원도보다 조금 넓고, 인구는 400만명이다.

조호르 주는 말레이시아 역사에 상징과도 같은 지역이다. 조호르는 말레이인의 나라로서 포르투갈, 네덜란드, 영국 등 유럽인들의 지배에 저항하거나 경쟁하는 위치에 있었다. 그 뿌리는 조호르 술탄국(Johor Sultanate)에서 시작된다.

 

1511년 말라카 술탄국이 포르투갈에 점령된 후 술탄 마흐무드 샤는 파항으로 도피했다가 싱가포르 남동쪽 빈탄(Bintan)섬에 근거지를 마련했다. 그는 말라카를 되찾지 못하고 1528년 운명을 달리했고, 그의 아들 알라우딘 리아얏 샤가 무리를 이끌고 조호르강 상류로 이동해 나라를 세운 것이 조호르 술탄국이다.

알라우딘은 말라카를 되찾기 위해 수시로 포르투갈 요새를 괴롭혔다. 카톨릭 국가인 포르투갈은 종교적 색채가 강했기 때문에 주변 무슬림 국가들이 조호르를 지원했다. 하지만 소마트라 섬의 아체(Aceh)는 포르투갈과 조흐르가 싸우는 틈을 타서 어부지리의 효과를 얻으려고 양쪽을 공격했다. 아체의 공격이 심할 때 포르투갈과 조호르는 휴전을 하기도 했다.

1600년대에 네덜란드가 동남아시아에 진출했다. 네덜란드인들은 신교도여서 종교적 편견에 매달리지 않았았기 때문에 조호르는 네덜란드와 동맹을 맺었다. 네덜란드는 말라카 이외의 지역을 탐내지 않는다는 조건을 제시했고, 조호르는 이를 받아들였다. 두 동맹국은 네덜란드 요새를 협공해 1641년 함락했다. 이후 말라카는 네덜란드령으로 떨어졌고, 조호르는 네덜란드의 도움으로 아체의 공격을 방어할수 있었다.

 

조호르 술탄국과 수마트라 섬 /위키피디아
조호르 술탄국과 수마트라 섬 /위키피디아

 

아체의 위협이 사라진 이후 조호르는 파항(Pahang)과 싱가포르 남쪽의 리아우(Liau) 열도를 지배하게 되엇다. 조호르의 팽창은 수마트라 섬 동부의 잠비(Jambi)의 견제를 받게 되었다. 처음엔 조호르의 술탄이 잠비 술탄의 딸을 부인으로 맞기로 하면서 화친을 추구했다. 하지만 조호르 술탄 압둘 잘릴 샤 3세가 파혼을 선언하고 다른 여자와 결혼함으로써 1666년 두 나라의 전쟁이 시작되었다. 잠비가 조호르의 수도를 공격하며 강세를 보이자 조호르 술탄은 술라웨시 섬의 해양민족 부기스(Bugis)족의 지원을 청했다. 부기스의 지원을 받아 13년간 지리하게 이어지던 전쟁은 1679년에 조호르의 승리로 끝났다.

술탄 마흐무드 2(제위, 1675~1699)는 편협한 인물이었다. 1699년 그는 귀족의 부인이 과일 한 조각을 훔쳤다는 이유로 여인을 처형시키자, 그녀의 남편이 휘두른 복수의 칼에 살해되었다. 술탄에겐 아들이 없었기 때문에 재상 가문인 벤다하라가에서 후보를 올려 술탄 압둘 잘릴 4세로 추대했다. 그런데 수마트라 서부 미낭카바우가 마흐무드 2세의 유복자가 있다고 주장하며 조호르를 쳐들어갔다. 미낭카바우는 어린 유복자 케칠을 술탄에 올려놓고 조호르를 주물렀다. 북쪽 파항으로 도주한 잘릴 4세가 죽고, 그의 아들 술라이만은 1722년 다시 부기스족에 손을 내밀었다. 이번에 조호르 정쟁에 개입한 부기스는 용맹한 오형제였다. 술탄 술라이만은 오형제의 도움으로 미낭카바우 세력을 밀어내는데 성공했지만, 내정의 실권은 부기스족 형제들에게 내주게 되었다.

 

부기스 세력들은 해상민족이었기 때문에 내륙에 들어가 있는 수도를 리아우 섬으로 옮겼다. 해적질을 하던 그들이 장사꾼으로 변했다. 조호르는 리아우 항구에 입항하는 외국 선박에 안전을 보장했고, 관세를 낮췄다. 하역과 선적을 수월하게 함으로써 각국의 상선을 유치했다. 중국, 인도, 순다열도, 캄보디아, 베트남, 태국의 배가 리아우에 입항했다. 다양한 상품이 쏟아졌다. 리아우엔 향료 무역의 중심이 되엇고, 중국의 차, 수마트라의 목재, 주석, 후추, 의류, 심지어 아편까지 거래되었다. 스페인령 필리핀에서 온 금과 은, 유럽의 화약·무기도 흘러들어왔다. 특히 빈랑고(gambier)가 유명했다. 열대 종려나무의 씨앗을 잎으로 싸서 씹는 것인데, 동남아에서는 껍처럼 씹는 풍습이 있었다.

리아우가 번창하면서 무슬림 신학자들도 몰려들었고, 인도 아대륙, 아라비아에서 온 학자들이 숙소를 장기체류하면서 선교 할동을 했다. 모자라는 노동력은 중국인 쿨리가 제공했다. 현대의 싱가포르가 하는 역할을 리아우가 했다.

유럽의 선박도 네덜란드령 말라카를 들르지 않고 물산이 풍부하고 저렴한 리아우에 기항했다. 네덜란드 동인도회사(VOC)는 조호르에 불만이 많았지만 협정을 중수하며 침범은 하지 않았다. 말라카는 서서히 쇠퇴했다.

 

조호르 술탄국의 분할 /위키피디아
조호르 술탄국의 분할 /위키피디아

 

조호르의 전성기를 종식시킨 것은 영국과 네덜란드등 서양 세력이었다. 1814년 나폴레옹 전쟁이 끝나고 네덜란드가 인도네시아를 되찾았고, 영국은 싱가포르를 건설했다. 싱가포르는 말레이반도의 조호르 내륙과 리아우 섬 중간을 차단했다. VOC 시절에 자바 섬에서 벗어나지 않던 네덜란드는 직할체제로 전환하면서 수마트라로 지배를 확대했다. 영국과 네덜란드는 양국 지배 영역에 경계선을 그을 필요가 생겼다.

1824년 영국과 네덜란드는 조호르 왕국의 의견을 묻지도 않고 일방적으로 협정을 맺어 말레이반도는 영국령, 수마트라섬과 자바섬은 네덜란드령으로 하기로 합의했다. 두 서양 국가에 의해 조호르는 분리되었다. 리아우 군도와 수마트라 동부의 인드라기리(Indragiri)는 조호르에서 떨어져 나갔다.

말레이 반도는 서서히 영국의 지배하에 들어가기 시작했다.

 


<참고한 자료>

Wikipedia, Johor Sultanate 

Wikipedia, Johor 

동남아시아사, 소병국, 2020, 책과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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