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리핀史①…바랑가이의 나라
필리핀史①…바랑가이의 나라
  • 김현민 기자
  • 승인 2024.02.15 14: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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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 이전에 부족공동체 생활…1521년 마젤란 도착, 1565년 스페인인 첫 정착

 

필리핀은 7,641개 섬으로 구성된 섬나라다. 우리나라 섬의 수 3,348개보다 두배 이상 많다. 큰 섬을 기준으로 하면, 루손섬, 비사야제도, 민다니오섬을 들수 있다. 이들 섬을 다 합친 면적은 30으로 대한민국의 3배나 되며, 인구도 11,400만명으로 세계 12위를 달린다. 이렇게 큰 나라가 하나의 정치 단위로 통합된 것은 16세기 스페인의 지배를 받으면서부터였다.

그 이전의 필리핀 역사를 기록한 문헌은 특별히 없다. 다만 2007년 루손섬 북쪽에 있는 칼라오 동굴(Callao Cave)에서 67천년 전의 것으로 추정되는 호모 루소넨시스(Homo luzonensis)의 뼈가 발견되면서 고대부터 사람들이 살아왔음을 입증했다. 필리핀에 온 고대인은 중국 남부에서 대만을 거쳐 이동한 것으로 추정된다. 3만년 전에 보르네오와 수마트라 등지에서 원주민 네그리토(Negrito)가 이주해 정착하였으며, 기원 전·후 말레이 계통 원주민이 유입되어 생활했다고 한다. 지금 필리핀인들은 인종적으로 오스트로네시아인(Austronesians)이며다.

6세기경 중국과 교역했다는 내용이 문헌에서 발견되었다. 중국 원대의 도이지략(島夷志略)에 마리노(麻里魯)라는 지명이 등장하는데, 이는 필리핀을 지칭하는 것으로 추정된다. 인도네시아에서 힌두교와 이슬람이 전파되었고, 14세기에 남부 민다나오 지역에 이슬람 술탄국이 건설되었다.

 

필리핀 열도 /위키피디아
필리핀 열도 /위키피디아

 

서양사회에 알려지기 전에 필리핀에는 '바랑가이‘(barangay)라고 하는 부족 공동체가 형성되어 있었다. 바랑가이는 말레이족이 필리핀 열도에 도래할 당시 타고 온 배의 이름을 본 딴 것으로 같이 온 사람들이 모여 하나의 공동체를 형성했다. 이들은 통일된 국가를 형성하지 않았고, 족장이 지배하는 부족국가 형태로 생활했다. 필리핀은 지형이 산악과 섬으로 이루어져 있어 원주민들이 정착 과정에서 자생적으로 부족 단위의 생활을 했다. 스페인인이 도착하기 전에 인구는 총 50만명으로 추정되는제, 지금의 0.5%도 되지 않는 인구다.

바랑가이는 다투(datu)라는 지배자를 중심으로 대개 30~100가구 정도로 구성되어 있었고, 마닐라나 세부 등과 같은 지역에서는 수백 가구가 넘는 대규모의 바랑가이도 존재했다. 지금도 필리핀의 행정단위에 가장 작은 단위를 바랑가이라고 부른다. 202310월 기준으로 필리핀에는 42,001개의 바랑가이가 있다.

 

필리핀 민다나오섬에서 발견된 힌두 금상(9~10세기) /위키피디아
필리핀 민다나오섬에서 발견된 힌두 금상(9~10세기) /위키피디아

 

최초로 필리핀에 도착한 서양인은 포르투갈인 페르디난드 마젤란(Ferdinand Magellan)이다. 마젤란은 포르투갈 태생이지만 스페인 국왕의 지원과 명령으로 항해했기 때문에 그의 필리핀 도착은 스페인의 공으로 돌아간다.

1519920일 마젤란은 5척의 배에 선원 270명을 태우고 지도에도 없는 바닷길을 떠났다. 남아메리카 끝 마젤란 해협을 돌 때에는 목숨을 건 모험이었다. 그는 희망없는 항해를 계속한 끝에 1521316일 필리핀 동부 사마르(Samar) 섬에 도착했다. 스페인 항해자들은 그곳에서 잠시 휴식을 취한 다음 47일에 세부(Cebu) 섬으로 가서 추장 후마본(Humabon)을 개종하는데 성공했다. 후마본은 카톨릭 개종을 통해 백인들의 환심을 사고, 총과 화약으로 무장한 그들을 끌어들여 이웃 부족을 정복하는데 활용하려는 의도를 갖고 있었다.

426, 마젤란은 후마본의 요청에 따라 무장한 선원 60명을 지휘하며 마크탄 섬에 상륙했다. 마젤란과 후마본의 동맹세력은 마크탄 부족을 공격했다. 마크탄의 추장 라푸라푸(Lapulapu)1,500명의 부족을 이끌고 맞서 싸웠다. 마젤란은 라푸라푸를 앝잡아 보았다. 라푸라푸는 적을 깊숙이 유인한 후 기습공격을 감행했다. 마크탄족은 마젤란을 집중적으로 공격했고, 이 전투에서 마젤란은 독화살을 맞았다. 마젤란은 황급하게 부하들에게 철수명령을 내렸지만, 자신은 도주하지 못했다. 그는 그곳에서 숨졌다. 부하들은 선물을 주며 마젤란의 시신을 송환받으려 했지만 마크탄은 이를 수용하지 않았다.

더 이상 전투를 할 여력을 잃은 마젤란의 부하들은 2척밖에 남지 않은 배를 이끌고 필리핀을 떠나고 말았다. 두척 중 빅토리아호 한 척만이 스페인까지 돌아갔는데, 이로써 인류최초의 세계일주가 시현되었다. 마지막에 도착한 18명은 항해보고서를 올렸고, 스페인은 마젤란이 죽은 필리핀을 기억하게 되었다.

 

페르디난드 마젤란이 필리핀 마크탄섬에서 라푸라푸 추장과 대결하는 그림(필리핀 막탄성당 벽화) /위키피디아
페르디난드 마젤란이 필리핀 마크탄섬에서 라푸라푸 추장과 대결하는 그림(필리핀 막탄성당 벽화) /위키피디아

 

마젤란의 원정 이후 스페인 왕국은 가르시야 조프리 데 로아이사(1525), 세바스티안 카봇(1526), 알바로 데 사베드라 세론(1527), 루이 로페즈 데 비야로보스(1542)를 대장으로 하는 네차례 원정대를 필리핀에 보냈다. 비야로보스(Ruy López de Villalobos)는 항해를 마치고 돌아와 당시 왕세자였던 펠리페(Felipe) 왕자의 이름을 따 자신이 탐험한 섬들을 "라스 이슬라스 필리피나스“(Las Islas Filipinas)라고 이름지었다. 필리핀(Philippines)의 국명은 여기서 비롯된다.

1556년 펠리페의 아버지 카를 4세는 합스부르크 제국을 둘로 나눠 스페인왕국을 아들에게 주고, 오스트리아와 신성로마제국은 동생 페르디난트에게 양위했다. 스페인 국왕이 된 펠리페 2세는 1564년 자신의 이름이 걸린 필리핀에 500명의 원정대를 파견했다. 이들은 이듬해 2월 필리핀에 도착했는데, 이들이 최초의 스페인 정착민이다.

 


<참고한 자료>

Wikipedia, History of the Philippines (9001565) 

Wikipedia, Ferdinand Magellan 

Wikipedia, Barangay 

동남아시아사, 소병국, 2020, 책과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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