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리핀史③…마닐라, 태평양 무역을 열다
필리핀史③…마닐라, 태평양 무역을 열다
  • 김현민 기자
  • 승인 2024.02.24 14: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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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평양 횡단한 갈레온 무역, 글로벌리제이션의 서막…은을 세계 기축통화로 정착

 

1565년 미겔 로페스가 필리핀 세부에 최초의 스페인 정착촌을 세우고 교회를 지은 후에 안드레스 데 우르다네타(Andrés de Urdaneta)에게 특별한 임무를 부여했다. 필리핀에서 멕시코로 되돌아가는 길을 찾으라는 것이었다. 페르디난드 마젤란과 그 이후 항해자들은 아메리카에서 필리핀으로 가는 길을 개척했지만, 멕시코로 돌아가는 길은 모르고 있었다.

우르다네타는 태평양에도 대서양과 마찬가지로 무역풍이 고리 모양을 형성하고 있을 것으로 보았다. 범선 시대의 항해자는 바람의 방향을 잘 이해해야 했다. 우르다네타는 태평양 북쪽으로 가면 동쪽으로 가는 무역풍을 만나고, 이 바람을 타면 북미 서해안에 도착할 것으로 예상했다. 그는 북위 38°까지 북동쪽으로 가서 거기에서 동쪽으로 진로를 택했다. 예상은 적중했다. 그는 지금의 캘리포니아의 멘도시노 곶 부근에 도착했고, 거기에서 해안을 따라 남쪽으로 내려가 아카풀코에 도착했다. 1565년 우르다네타가 발견한 태평양 횡단항로는 우르다네타 루트(Urdaneta's route)라 명명되었다. 이 항로의 발견은 인류역사에 상품교역의 국제화, 즉 글로벌리제이션(globlaization) 시대를 열었다.

 

마닐라~아카풀코 칼레온 무역로와 세계무역 /위키피디아
마닐라~아카풀코 칼레온 무역로와 세계무역 /위키피디아

 

바로 직전인 1545, 스페인 식민자들은 남미 볼리비아 포토시(Potosí)에서 대량의 은이 매장된 광산을 발견했다. 광산이 본격적으로 개발되면서 포토시 은광은 전세계 은 수요의 대부분을 충당했다. 또 중국 명나라는 은으로 세금을 걷는 일조편법(一條鞭法)을 시행, 15601570년경에 먼저 강남(江南) 지역을 중심으로 시행되고 점차 북쪽 지역으로 보급을 확대해 나갔다. 중국은 은 본위제를 시행하면서 막대한 은을 필요로 했다.

필리핀에는 특별한 산물이 없었다. 인도네시아 해역에서처럼 향신료가 생산되지 않았고, 남미처럼 금은과 같은 광물의 매장지도 없었다. 다만 지정학적 조건이 좋았다. 중국과 일본이 이웃해 있었고, 남쪽에 인도네시아 열도엔 오랜 전통의 해상세력이 있었다.

당시 필리핀은 멕시코 부왕령의 지휘를 받았다. 1570년초에 스페인은 마닐라를 개척한 이후 마닐라~아카풀코의 무역을 확장시켰다. 당대 사람들은 이 무역을 갈레온 무역’, 또는 마닐라 갈레온이라고 했다. 마닐라 갈레온은 좁게는 태평양 동쪽 뉴스페인과 서쪽의 필리핀을 연결하는 스페인 내 무역이지만, 넓게는 아메리카와 아시아, 유럽의 세 대륙을 연결하는 세계무역의 대동맥이기도 했다.

 

마닐라 갈레온은 1565년부터 1815년까지 250년간 지속되었다. 갈레온선은 필리핀 마닐라만의 카비테(Cavite)에서 출발했다. 배는 무역풍의 시기를 기다려 매년 6월말과 7월초에 출항했다. 돌아오는 배는 멕시코 아카풀코에서 출발했는데, 출항시기는 이듬해 3월말~4월초였다. 항해시간은 빠르면 두달 보름정도, 길면 네 달이 걸렸다.

필리핀에서 아메리카로 갈 때 바람은 배를 캘리포니아에 내려 주는데, 갈레온 선은 몬터레이에서 40일정도 정박했다가 아카풀코로 내려가곤 했는데, 캘리포니아 해안이 이 배로 인해 개척되었다. 항로는 하와이 인근을 지나지만 250년 동안에 갈레온 선이 하와이에 들렀다는 기록이 전혀 없는 게 이상할 정도다.

 

갈레온선(1590년 그림) /위키피디아
갈레온선(1590년 그림) /위키피디아

 

가장 중요한 교역품은 은()이었다. 당대 최대의 국가는 명나라였고, 이 나라가 은으로 세금을 걷고 은을 통화단위로 사용하면서 은의 수요가 폭발했다. 하지만 중국내에서 채굴되는 은의 양은 수요를 대질 못했고 부족분을 수입해야 했다. 마침 남미 포토시와 멕시코에서 생산된 은이 마닐라 갈레온을 통해 중국에 공급되었다.

당시 볼리비아와 멕시코에서 전세계 은의 80%를 생산했는데, 이 중 30%가 태평양을 건너 중국에 조달되었다. 중국의 은 수요가 팽창하면서 일본산 은도 중국에 직수출되었다.

마닐라 갈레온은 스페인과 중국 모두에게 큰 이익을 가져다 주었다. 당시 중국에서 거래되는 은의 가격과 중국 이외에서 거래되는 은 가격이 2배의 차이가 났는데, 스페인 상인들은 그 아비트리지(arbitrage)의 차액을 활용했다. 중국 상인들도 비단과 차를 싸게 사서 비싸게 팔아 막대한 이문을 남겼다.

은의 교역이 활성화됨으로써 은이 세계 무역의 기축통화가 되었다. 금은 보물로서의 가치는 있었지만, 무역거래를 감당할 물량이 되지 못했다. 대량생산이 가능한 은이 최대 경제국가였던 중국의 통화로 자리매김했고, 국제거래의 교환수단이 되었다.

 

16세기에 포르투갈과 스페인이 대양을 가로질러 신대륙을 발견하고 동양과 서양의 해상교역로를 열었지만, 무역의 세계화를 이끌어낸 것은 중국이었다. 중국이 전세계의 은을 빨아 당겼고, 세계에서 가장 우수한 중국의 비단과 차, 생활용품이 서양에 공급됨으로써 국제무역이란 개념이 생겨났다. 포르투갈은 인도네시아 말루쿠 섬에서 생산된 향료의 교역에 집중했지만, 스페인은 태평양과 대서양을 가로지르며 세계 무역을 완성했다. 필리핀에서 멕시코로 이동한 물량은 대서양을 건너 스페인과 유럽으로 건너갔다. 유럽의 물자가 두 대양을 거쳐 아시아로 이동했다.

마닐라 갈레온의 교역범위는 두 항구를 연결하는데 그치지 않았다. 푸젠의 장저우(漳州), 취안저우(泉州), 광둥의 광저우(廣州)에서 온 물자가 마닐라에 집결했다. 스페인이 마닐라를 건설하기 4년 전에 명나라는 바다에 대한 통제(해금정책)을 해제했다. 이에 푸젠과 광둥의 상인들이 상선을 띄우고 이주하는 일이 크게 늘었다. 중국 상인들은 생사, 견직물, 도자기 등을 싣고 마닐라로 향했다. 마닐라에 들어온 중국 상선은 1573년에 8척에서 1600년대 전반에 50척으로 급증했다. 1570년대에 마닐라에 거주하는 중국인이 40명에 불과했는데, 60년 후엔 그 수가 2만명으로 불어났다.

일본의 생산품도 필리핀에 집결했다. 세계 정복의 망상에 빠져 있던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마닐라에 사신을 보내 조공을 바칠 것을 요구했으나 거절당했다. 그는 스페인의 무장력이 뛰어나다는 사실을 알고는 조공 요구를 포기했으나 마닐라와의 교역을 통해 화약과 전쟁 물자를 구입해 갔다. 이 물자가 임진왜란에 활용되었다.

마닐라에는 인도네시아, (태국) 등지에서도 교역품이 건너왔고, 크메르의 사신도 찾아왔다.

남미와 중미에서 생산된 은과 광산물은 모두 아카풀코에 집결했다. 유럽에서 건너온 물건, 심지에 아프리카의 산물로 아카풀코에 모여 태평양을 건너갔다. 당시 아카풀코에 모인 상품의 80%가 아메라키산이고, 20%가 유럽산이었다고 한다.

마닐라는 세계무역의 중심지로 번성했다. 초기 마닐라 갈레온은 제한이 없었다. 그러자 스페인 본국의 최대무역도시 세비야 상인들이 경계심을 갖게 되었다. 그들은 펠리페 2세에게 갈레온 무역의 제한을 요구했고, 국왕은 1593년에 마닐라 갈레온의 왕복 회수를 연간 2회를 넘지 않도록 제한했다.

 

마닐라의 멕시코 광장에 있는 마닐라-아칼풀코 갈레온 무역 기념물 /위키피디아
마닐라의 멕시코 광장에 있는 마닐라-아칼풀코 갈레온 무역 기념물 /위키피디아

 

태평양을 건너는 갈레온선은 당대로선 최대의 상선이었다. 당시 기록을 보면 1609년에서 1616년까지 마닐라항 조선소에서 9척의 갈레온선과 6척의 갤리선이 건조되었다. 갈레온선 한척 건조하는데 78,000 페소의 자금과 필리핀산 목재 1,700~2000톤이 소모되었다. 이는 나무 2,000그루에 해당했다. 한척에 300~500명의 승객이 탔다. 1638년에 난파한 콘셉시온호의 경우 길이가 43~49M에 달했고, 중량은 2,000톤으로 추정되었다.

 

갈레온 무역은 인도의 동인도회사가 1762~1764년에 마닐라를 점령한 이후 쇠퇴하다가 멕시코에서 독립전쟁이 벌어지면서 1815년에 막을 내렸다. 이후 뉴스페인은 멕시코로 독립하고, 필리핀은 스페인 본국이 직접 관할하게 되었다.

 


<참고한 자료>

Wikipedia, History of the Philippines (15651898) 

Wikipedia, Manila galleon 

Wikipedia, Global silver trade from the 16th to 19th centuri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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