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리핀사⑩…사험대에 오른 방사모로
필리핀사⑩…사험대에 오른 방사모로
  • 김현민 기자
  • 승인 2024.03.10 15:01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1국2체제 방식…카톨릭-무슬림의 50여년의 갈등 극복하고 2019년 자치구 출범

 

필리핀의 인구는 11,400만명, 이중 78%가 카톨릭이고, 6%가 기독교, 무슬림은 6.4%. 무슬림(모로)은 주로 필리핀 남부 민다나오섬과 술루열도에 살고 있다.

1946년 필리핀이 독립을 했지만 민다나오 서남부 무슬림들은 카톨릭 정권 하에서 여전히 차별을 겪고 있었다. 무슬림 지역이었던 민다나오와 팔라완에 카톨릭 이주자들이 밀려와 다수를 차지했고, 무슬림은 한쪽 구석으로 밀려 났다. 다만 스페인, 미국, 일본 등 외세의 종교적 문화적 인종적 강요가 없다는 점에서 비교적 평온한 분위기가 유지되었다.

이 평온을 깬 것은 19683월 마닐라만의 어부들에 의해 한 병사가 구조된 사건이었다. 구사일생으로 목숨을 건진 병사의 입에서 엄청난 비밀이 폭로되었다 1963년 보르네오 북부 사바주가 말레이시아에 편입되자 이 지역을 자국 영토라고 주장하는 마르코스 대통령이 영토회복을 위해 비밀리에 모로인 30명을 차출해 훈련시켰다. 모로 병사들은 무슬림 형제를 살해할수 없다며 폭동을 일으켰고, 이 사태가 국제문제로 비화될 것을 우려해 군 당국이 집단학살을 저질러다는 것이다.

이 사건이 남부 모로인들을 자극했고, 무슬림 학생들은 시위를 벌였다. 코타마토의 주지사 다투 우톡 마탈람은 무슬림 독립운동을 주창했고,, 197210월 필리핀대 교수였던 누르 미수아리(Nur Misuari)를 중심으로 무슬림 지도자들이 모로민족해방전선(MNLF, Moro National Liberation Front)을 결성했다. 이들은 무장투쟁을 통해 무슬림의 독립을 추구했다.

페르디난드 마르코스 대통령은 모로의 무장투쟁을 장기독재의 빌미로 삼았다. 그는 폭압적으로 무슬림을 억압했다. 민다나오의 카톨릭들은 마르코스에 협력해 자경대를 구성했다. 한쪽이 다른 쪽을 공격하면, 그곳은 보복 공격을 감행했다. 정부와 모로, 카톨릭과 무슬림의 대립은 증오와 폭력, 유혈사태를 유발했다. 마르코스 정권은 3만명의 모로 반군을 제압하겠다고 필리핀군 전병력의 70~80%를 내전에 투입했다. 19749월 민다나오 필림방 마을엔엔 정부군이 덥쳐 11~70명이 살해되고 어린이와 여성 3,000명을 구금핟고 가옥 60채가 피괴되는 일도 있었다. 비슷한 시기에 필리핀군은 모스크에서 기도하는 모로인 1,000명을 학살하기도 했다. 1972년에서 1980년 사이에 모로지역의 내전으로 5만명이 사망하고 100만명의 이재민이 발생했으며, 10만명의 무슬림이 난민이 되어 이웃 말레이시아로 이주했다.

 

술루 홀로섬의 모스크 /Wikipedia
술루 홀로섬의 모스크 /Wikipedia

 

세상은 마르코스의 편이 아니었다. 1970년대 두차례의 오일쇼크를 일으키며 사우디아라비아 등 무슬림 산유국들이 세계를 좌지우지하던 시절이었다. 필리핀은 사우디와 이란의 석유에 의존하고 있었다. 이슬람협력기구(OIS, Organisation of Islamic Cooperation)는 마르코스 정권에게 MNLF와 협상을 하라고 압력을 넣었다.

마르코스는 어쩔수 없이 협상에 응했다. 석유공급이 중단될 위기에 처했기 때문이다. 사우디 지다에서 회담이 열렸고, 모로측에서는 MNLF의 미수아리 의장이 참석했다. 지리한 협상이 진행되었으나, 미수아리가 독립에서 자치로 요구조건을 완화하면서 타결의 기미가 보였다. 회담장소가 리비아의 트리폴리로 옮겨졌고, 무아마르 가다피가 중재에 나섰다. 19761223일 필리핀정부와 MNLF는 마침내 트리폴리 협정(Tripoli Agreement)을 체결하게 되었다.

트리폴리 협정은 정전에 초점에 맞추어졌고, 자치에 관한 세부사항은 추가로 논의해야 했다. 미수아리는 남부 13개주를 단일 자치구역으로 지정할 것을 주장한 반면에 루손 정부측은 주별로 주민투표를 거쳐 자치구역 편입여부를 결정해야 한다는 입장을 고수했다. 주마다 무슬림과 카톨릭의 인구구성이 복잡하기 때문에 13개 주를 일방적으로 자치구로 편입할 경우 카톨릭이 다수인 주에는 부당한 결과가 빚어진다는 것이다. 예컨대 무슬림주에는 이혼과 일부다처제를 인정하는데, 카톨릭은 이를 인정하지 않는다. 이 부분에는 정부측 주장에 타당성 있었다.

세부협상이 지지부진한 가운데 MNLF 부의장이던 살라맛 하심(Salamat Hashim)이 트리폴리협정에 불만을 품고 모로의 진정한 독립을 추구하며 MNLF와는 별도의 모로이슬람해방기구(MILF, Moro Islamic Liberation Front)를 조직했다. MNLFMILF은 종족적으로 구분되는 측면도 있었다. MILF의 지도자 살라맛은 분리 독립의 강경 투쟁노선을 견지했기 때문에 타협 여지가 없었고, 필리핀 정부는 MNLF와 먼저 평화 협상을 벌였다.

 

모로이슬람해방전선(MILF) 전사 /Wikipedia
모로이슬람해방전선(MILF) 전사 /Wikipedia

 

1986년 마르코스 독재정권이 피플파워로 붕괴하고 코라손 아키노 정부가 들어섰다. 집권 직후 아키노는 미수아리의 고향인 술루 마임붕을 방문해 그를 공식적으로 면담했다. 아키노는 미수아리가 요구한 단일 자치구 지정을 받아들였고, 미수아리는 분리독립을 접고 자치안을 받아들였다. 서로가 한발씩 양보해 합의한 문안은 이듬해 1월 사우디 지다에서 정부대표와 마수아리에 의해 서명되었다. 이를 토대로 199011월에 민다나오무슬림자치구(ARMM, Autonomous Region in Muslim Mindanao)가 설치되었고, 이어 피델 라모스 정부가 1996MNLF와 최종평화협정(Final Peace Agreement)을 체결했다. 협정에 따라 MNLF는 무장 투쟁을 포기했고, 미수아리는 ARMM의 주지사로 선출되기도 했다.

 

한편 MILFMNLF와 정부의 평화안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1990년대말에 파키스탄에서 활동하던 하심이 민다나오로 귀국해 산악지대에 본부를 세우고 무장투쟁을 전개했다. 미수아리의 무슬림 자치정부가 부패하고 실정을 노출하면서 많은 무슬림들이 실망하고 MILF를 지지하게 되었다. 하심의 산악캠프에서 12만명의 대원이 군사훈련을 받았다는 보고서가 있다.

조셉 에스트라다 정부는 MILF를 소탕하기 위해 대규모 군사작전을 펼쳤으나, MILF 조직을 와해시키는데 실패했다. 에스트라다 정권도 집권 2년만인 2001년에 피플파워로 물러나고 부통령이던 글로리아 아로요 정부가 들어섰다. 이어 강성파 살라맛이 2003년 사망함으로써 양측에 협상 분위기가 조성되었다. 2003년 아로요 정부와 MILF는 휴전협정을 체결했다.

 

방사모로 자치구와 필리핀의 종교분포 /Wikipedia
방사모로 자치구와 필리핀의 종교분포 /Wikipedia

 

20121015일에 코라손 아키노의 아들 베니그노 아키노 정부는 MILF과 자치구 설립에 합의하고, 2014325일 마닐라에서 체결된 평화협정에서 방사모로 자치구(Bangsamoro Autonomous Region) 설립 계획이 채택되었다. 방사(bangsa)는 타갈로그어로 나라(nation)이란 뜻으로, 방사모로는 모로국가라는 의미다.

20158월에 필리핀 의회는 방사모로 자치구 기본법을 통과시켰다. 이 법에 따라 방사모로 자치구는 독자적인 입법부, 행정부, 사법부, 자치 정부 수반을 갖게 되며, 경찰, 국방, 외교, 통화 발행은 중앙 정부가 행사한다. 또한 이슬람교의 율법인 샤리아는 무슬림에 한해서 적용된다. 12체제 방식의 공존이 모색된 것이다.

방사모로 자치구는 민다나오 남서부와 술루열도로 구성된다. 면적은 13,536으로, 강원도 면적과 비슷하고, 인구는 400만명에 이른다. 로드리고 두테르테 정부는 방사모로조직법(BOL, Bangsamoro Organic Law)을 입안, 20187월 의회를 통과시켰고, 2019121일 국민 투표를 거쳐 최종 확정되었다. 2019222일 무라드 에브라힘(Murad Ebrahim)이 방사모로의 수석장관(Chief Minister)에 취임했다. 수석장관은 총리에 해당하는 직책이다.

 

2019년 2월 방사모로 수석장관 무라드 에브라힘 취임 행사에 로드리고 두테르테 대통령이 모로족의 전통 아궁(Agung)을 치고 있다. /Wikipedia
2019년 2월 방사모로 수석장관 무라드 에브라힘 취임 행사에 로드리고 두테르테 대통령이 모로족의 전통 아궁(Agung)을 치고 있다. /Wikipedia

 

하지만 MILF에 반대하는 또다른 세력이 등장했다. 1990년대에 파키스탄과 아프가니스탄에서 알카에다의 오사마 빈라덴을 접촉했던 압두라작 잔잘라니가 귀국해 아부 사야프(Abu Sayyaf)라는 무장단체를 조직했다. 지하드를 주장하는 이 조직은 여러차례 테러사건을 주도하기도 했다. 한때 2000명을 넘던 이 조직은 현재 20명으로 급감했다고 한다. 모로해방단체들이 오랜 기간 동안 정부와 타협하는데다 루손 정부의 대대적인 지원 정책에 힘입어 테러 단체에 대한 무슬림의 지지가 줄어든 것이 영향을 미쳤을 것으로 본다.

 


<참고한 자료>

Wikipedia, Moro conflict 

Wikipedia, Bangsamoro 

Wikipedia, Abu Sayyaf 

평화로의 험난한 길 필리핀 무슬림 분쟁, 김동엽, 서울대아시아연구소, 2023 겨울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