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리핀史④…중국인 학살사건
필리핀史④…중국인 학살사건
  • 김현민 기자
  • 승인 2024.02.25 13: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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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교 늘어나자 스페인 당국이 수차례 탄압…그 후손이 필리핀의 20% 차지

 

필리핀의 스페인 통치시기(15651899)에 중국인 학살 사건이 다섯 차례나 기록된다. 1603, 1639, 1662, 1686, 1762년이다. 필리핀 중국인의 뿌리는 푸젠(福建)으로, 이들이 필리핀에 건너온 것은 스페인 사람들보다 먼저다. 초기 스페인 탐험자들의 기록에 중국인들이 등장한다.

1570년 스페인이 마닐라를 개척할 때에만 해도 먼주 정착했던 중국인과 우호적이었다. 중국인 상인들은 중국 화물을 갈레온선에 실어 아메리카로 보냈다.

1574년 중국 해적 린펑(林鳳) 일당이 명나라의 단속에 밀려 루손섬으로 도피해 왔을, 때 스페인군과 충돌했다. 숫적으로 중국 해적이 많았지만 화력에는 스페인군을 이겨내지 못햤다. 린펑 해적떼가 소탕된 후 명나라 사신단이 필리핀에 건너와 감사의 뜻을 표했고, 그들이 돌아갈 때 스페인은 사절과 선교사들을 붙여 중국에 보내기도 했다. 중국에 카톨릭을 선교할 기회를 얻기 위해서였다. 중국은 서양 종교의 전파를 허용할 듯했으나 확답은 피했다.

 

필리핀의 중국인(16세기말 그림) /위키피디아
필리핀의 중국인(16세기말 그림) /위키피디아

 

스페인 사람들이 두려움을 느낀 것은 중국 이주민들의 급속한 팽창이었다. 마닐라가 스페인의 동방 무역거점으로 성장하자 중국인들이 밀려왔다. 1586년 마닐라의 중국인 수는 1만명을 넘어 스페인인 인구의 5배나 되었다.

중국인의 팽창에는 스페인 사람들이 빌미를 주었다. 태평양 교역이 늘어나면서 화물 운송에서 하역, 선적에 필요한 노동력을 중국인에게서 구했다. 말레이시아의 영국인, 인도네시아의 네덜란드인들처럼 필리핀에서 스페인 사람들은 원주민을 쓰지 않고 중국인을 부렸다. 서양사람들이 보기엔 원주민들은 게을렀고 일을 시켜도 제대로 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대신에 중국인들은 부리기 쉬웠고 시키는 일을 잘 했다. 이런 편견은 유럽인들이 동남아시아를 식민화하는 과정에서 구체화되었고, 화교들이 늘어나는 이유가 되었다.

 

스페인인들은 중국인들을 노예처럼 부렸다. 159310월 마닐라의 스페인 7대 총독 고메스 페레스 다스마리나스는 포루투갈의 말라카 제도를 공격하기 위해 원정길에 나섰다. 스페인 선원들은 노를 젓는 중국인들에게 심하게 채찍질을 하며 괴롭혔다. 중국인들은 선상반란을 일으켜 총독을 비롯해 스페인 선원, 병사들을 모두 죽여 버리고 배를 훔쳐 베트남으로 달아났다.

이 사건이 있은 후 스페인 당국은 중국인들을 마닐라에서 내쫓고 파시그 강 북쪽으로 이주시켰다. 1596년에는 12,000명의 중국인을 본국으로 강제 송환시켰다.

만력제 재위기의 명 조정은 조선의 임진왜란, 서북 영하의 반란, 서남쪽 묘족의 반란을 수습하느라, 필리핀 사태에 신경쓸 겨를이 없었다. 명나라의 재정이 고갈되는 가운데 중앙과 지방 정부는 세수 확보에 혈안이 되었다.

이때 푸젠성 세리가 좋은 아이디어를 냈다. 여송기역산(呂宋機易山)에 어마어마한 황금 산이 있다더라면서 여기서 세금을 걷자고 했다. 여송은 루손섬이고, 기역산은 마닐라만의 카비테(Cavite) 반도를 이른다. 푸젠성은 원정대를 보내는 방안을 고려했으나 금광의 존재 여부를 믿을수 없는데다 사방에 전란이 일어나 나라가 피폐한 상태였기 때문에 일단 마닐라에 사절단을 파견해 금광이 있는지를 알아보기로 했다.

 

마닐라만의 카비테 반도 /위키피디아
마닐라만의 카비테 반도 /위키피디아

 

이리하여 16033월 장억(張嶷), 왕시화(王時和) 등으로 구성된 중국 칙사단이 마닐라에 왔다. 그들은 총독의 융숭한 접대를 받으며 현장을 시찰해으나 쓰레기 더미만 있고 금은 찾아볼수도 없었다.

칙사는 마닐라 화교촌에 군림하고 통치하려고 했다. 스페인 총독부는 그들의 행동을 말렸지만 칙사들은 조금도 개의치 않았다. 두 세력의 세계관이 충돌했다. 중화주의자들은 마닐라를 중국의 속지로 보았고, 스페인 지배자에겐 중국인 주민도 스페인왕의 신민이었을 뿐이다. 어쨌든 칙사의 방문으로 루손의 화교들은 황제가 자기들을 도와줄 것이란 기대를 갖게 되었다.

칙사단이 돌아간 뒤 양측의 분위기가 냉랭해 졌다. 스페인 사제들은 중국이 본격적인 침공에 앞서 염탐꾼을 보낸 것이라고 의심하고 화교들이 동조할 것을 두려워 했다. 필리핀 원주민꽈 일본계 사람들도 스페인의 편에 섰다.

 

중국인들은 스페인에 대항해 파업을 준비했다. 화교마을의 촌장은 카톨릭 신자였는데 촌민에게 반란을 일으키지 말라고 설득했다. 주모자는 그의 양아들이었다. 중국인들은 촌장에게 대의에 가담할 것을 종용했다. 촌장은 거절하고 그들의 음모를 당국에 고발해 버렸다. 그런데 스페인 사람들은 그를 체포하고 집에서 화약이 발견된 것을 빌미로 사형에 처해 버렸다.

중국인들은 격분했다. 스페인 사람들은 중국인의 봉기를 미리 알았기 때문에 마닐라 성문에 병력을 배치했다. 1603103일 중국인들은 스페인인 한 가족을 살해하고 교회를 습격했다. 10년전 아버지 고메스가 중국인에게 살해된 후 총독을 승계한 루이스 페레스 다스마리나스는 반란자들에 대해 강경진압을 명령했다. 며칠 동안 아비규환의 살육이 진행되었다. 죽은 사람은 15,000~25,000명에 이르는 것으로 추정되었다. 지방으로 도망간 300여명의 중국인만이 살아남은 것으로 전해진다.

 

중국인들을 모두 척살한 후에 노동력이 모자라게 되자 무역업 자체가 중단될 위기에 처했다. 마닐라 총독부는 하는수 없이 푸젠성과 광둥성에 서신을 넣어 그간의 일을 왜곡해서 해명하고 무역을 재개하고 인력을 보내달라고 했다. 멸망 직전의 명나라 관리들은 스페인인의 변명이 거짓말임을 알고도 항의하지 않았다.

다시 중국인들이 들어왔다. 학살이 있은 다음해에 중국인 상인들이 마닐라에 입항했고, 중국인들이 갈레온선의 짐을 나르고 노를 저었다. 1605~1610년 사이에 마닐라의 무역은 연간 300만 페소에 달했는데, 이는 이전 어느때보다 호황이었다. 마닐라의 중국인들은 1620년대에 15,000, 1630년대 21,000명으로 늘어났고, 1639년에는 33,000~45,000명으로 불어났다.

 

중국인이 다시 팽창하자 스페인 당국은 다시 제한을 가했다. 중국인에겐 필리핀 원주민에게 물리는 세금과 노역의 의무를 지우지는 않지만, 대신에 과중한 면허세를 물렸다. 그 외에 극심한 인종차별을 가했다.

1603년의 학살이 끝이 아니었다. 이후에도 스페인 통치자들은 주기적으로 중국인을 집단살해했다.

1639년엔 지방으로 강제이주 당한 중국인들이 무기를 들고 마닐라를 향해 행군했으나, 스페인군의 발포로 17,000~22,000명이 살해되었다.

1662년엔 푸젠성의 해상지도자 정성공(鄭成功)이 반청(反淸)의 기치를 내걸고 대만을 점령한 직후, 필리핀에 조공을 바치도록 명령했다. 스페인 당국은 이를 거절하며 화교들의 동조를 우려해 소개령을 내렸는데, 이에 반발하는 중국인들이 많이 죽었다. 정성공이 일찍 죽고 대만의 필리핀 침공은 유야무야되었다. 그후 필리핀에선 1686, 1762년에도 중국인 학살사건이 발생했으나, 만주족의 청나라는 관심을 두지 않았다. 1815년 멕시코를 오가는 갈레온 무역이 폐지된 이후 인력 수요가 줄어들면서 중국인 이주민의 물결이 수그러들었다.

 

필리핀의 중국계 상글레이 여인 /위키피디아
필리핀의 중국계 상글레이 여인 /위키피디아

 

필리핀에서 중국인 핏줄을 이어받은 혼혈인을 상글레이(Sangley)라고 부르는데, 인구는 현재 220만 정도로 필리핀 전체인구의 20%를 차지한다. 스페인 지배 334년 동안에 대형사건만으로 5차례나 학살되면서도 중국인들이 끈질기게 뿌리를 내린 것이다.

 


<참고한 자료>

Wikipedia, Sangley Rebellion 

Wikipedia, 2nd Sangley Rebellion (1639) 

Wikipedia, Sangley Massacre (1662) 

2) Wikipedia, Sangle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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