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리핀사⑧…미국의 독립 약속 이행
필리핀사⑧…미국의 독립 약속 이행
  • 김현민 기자
  • 승인 2024.03.06 17: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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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리핀인, 일본 통치에 완강히 저항…스페인, 미국, 일본 거치며 381년만에 독립

 

미국의 식민지로 떨어진 후 필리핀은 빠르게 성장했다. 스페인 지배시절인 1895년 필리핀의 무역규모는 6,200만 페소에 불과햇으나, 미국 지배기간인 1920년엔 6100만 달러로 불어났다. 1930년대에 건강보험제도가 도입되고 의료제도가 개선되어 필리핀의 사망률이 미국 수준에 근접할 정도로 떨어졌다. 미국은 스페인과 달리 민주주의를 선물했다. 필리핀인들은 하원과 상원의원을 선출함으로써 완전하지는 않지만 대의정치의 맛을 보앗다. 정당도 생겨났다. 상원의장 마누엘 케손이 이끄는 국민당은 완전하고 즉각적인 독립을 주장하면서도 미국과 타협하는 노선을 견지했다. 필리핀 정치인들은 사절단을 꾸려 미국으로 건너가 독립을 청원했다. 그럴 때마다 워싱턴은 자치능력이 미비하다, 경제적으로 안정되지 않았다, 사회적 환경이 좋지 않다는 등의 핑계를 댔다. 11번의 독립청원사절단이 갔으나 번번히 거절당했다.

그러다가 뜻하지 않게 미국 내부에서 필리핀을 독립시키자는 여론이 형성되었다. 그 배경은 대공황이었다. 필리핀의 주요 수출품은 설탕과 노동력이었다. 사상 초유의 공황이 계속되자 사탕수수 농가는 저가의 필리핀산 설탕 수입을 막아달라고 정부에 요구했고, 노조도 필리핀 노동자의 입국을 저지해달라고 했다. 연방정부는 식민지 생산품과 인력의 유입은 내국간 거래이자 이동이므로 막을수 없다고 했다. 그러자 설탕생산업자와 노조는 필리핀인들이 원하는 대로 독립시키면 되지 되지 않느냐고 해법을 제시했다.

공황이 장기화하면서 미국은 필리핀 식민지률 유지하는 것이 짐이 되었다. 차제에 독립을 시켜 부담을 줄여야겠다고 판단했다. 그렇게 해서 미국 의회에서 만들어진 법안이 1933년 해어-호스-커팅 법(HareHawesCutting Act)이었다. 허버트 후버 대통령은 이 법안을 거부했지만 의회는 통과시켜버렸다. 하지만 필리핀 상원의장이던 케손은 미군이 필리핀의 해군기지를 통제할 소지가 있다는 이유로 동료들을 설득해 미 의회를 통과한 법안을 거부했다.

필리핀 의회의 반대에 부딪치자 미 의회는 새로운 법안을 제정했는데, 타이딩-맥더피 법(TydingsMcDuffie Act)이다. 이 법은 외교권과 일부 법률을 제외하고 필리핀 자치정부(Commonwealth of the Philippines)가 내정을 온전하게 책임지도록 했다. 또 미국이 파견한 총독(Governor-General)을 폐지하고 고등판무관(High Commissioner)으로 대체하도록 했다. 고등판무관은 대외적으로 국가수반이지만, 내정엔 간섭하지 않는다. 자치정부가 수립된 후 10년이 지나 미국독립기념일인 74일에 완전한 독립을 이룬다는 내용도 못박았다.

 

1942년 필리핀 자치정부의 마누엘 케손 대통령이 일본에 필리핀을 점령당한 후 워싱턴으로 망명, ,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의 영접을 받고 잇다. /위키피디아
1942년 필리핀 자치정부의 마누엘 케손 대통령이 일본에 필리핀을 점령당한 후 워싱턴으로 망명, ,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의 영접을 받고 잇다. /위키피디아

 

필리핀 정치인들은 타이딩-맥더피 법안을 수용했고, 이후 일정은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1934324일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은 법안에 서명하고, 이 법에 따라 그해 710일 제헌의회를 선출하는 총선이 치러졌다. 이어 730일 제헌의회가 개원하고 헌법제정에 들어가 다음해인 193528일 제헌의회를 통과하고, 323일 미국 대통령의 승인을 받았다.

1935년에 917일에 실시된 대통령 선거에 3명의 후보가 나섰다. 상원의장이었던 마누엘 케손, 1공화국의 초대 대통령이었던 에밀리오 이기날도, 카톨릭 신부 출신의 그레고리오 아글리파이가 경합하는 가운데 케손이 687.99%의 압도적인 지지를 받고 당선되었다. 케손의 러닝메이트로 세르지오 오스메냐가 부통령에 당선되었다.

1935111530만 마닐라에서 군중이 몰려든 가운데 팔리핀 자치정부 수립이 선포되었다. 이로써 미국과 필리핀 자치정부의 합의에 필리핀은 194674일 독립하기로 예정되었다. 케손과 오스메냐는 독립에 이르기까지 과도정부를 이끌게 되었다. 자치정부는 국방법을 제정해 징병제를 통해 방위군을 조직했다. 하지만 예상치 못한 일이 벌어졌다. 일본이 쳐들어온 것이다.

 

1944년 10월 더글러스 맥아더 장군이 필리핀 레이테만에 상륙하고 있다. /위키피디아
1944년 10월 더글러스 맥아더 장군이 필리핀 레이테만에 상륙하고 있다. /위키피디아

 

1941128일 일본군은 하와이 진주만을 공격한지 10시간 후 필리핀을 공격했다. 앞서 루스벨트 대통령은 미군과 필리핀군을 통합해 5만 병력의 극동미군을 창설하고 더글러스 맥아더 장군에게 지휘를 맡겼다.

혼마 마사하루가 이끄는 일본 제14군은 13만 병력과 탱크 90대를 보유했고, 항공기 541대의 지원을 받아 루손섬에 상륙했다. 미군은 전투기가 없었다. 맥아더는 압도적인 일본군에 밀려 마닐라를 파괴하지 않기 위해 무방비 도시(open city)로 선언하고 후퇴했다. 루스벨트는 맥아더를 호주로 전출명령을 내렸고, 새 사령관으로 임명된 조너선 웨인라이트는 56일 혼마에게 항복했다. 일본군은 포로로 잡힌 미군과 필리핀군 8만명에게 바타얀 반도까지 걸어가게 해 1만명 가까운 병력이 사망하는 참사가 빚어졌다. 극동미군으로선 치욕의 순간이었다.

케손 대통령과 오스메냐 부통령과 각료들은 미국으로 건너가 망명정부를 수립했다. 필리핀을 점령한 일본군은 행정위원회를 구성해 군정을 실시하다가 미국이 자치정부에 독립을 약속한 사실을 부정할수 없어 겉으로 독립정부인 것처럼 보이는 괴뢰정부 수립을 추진했다.

1899년에 제1공화국 초대 대통령이 되었다가 미군에 의해 실각한 에밀리오 아기날도는 1935년 자치정부 대선에 낙선, 실망했으나 이번에도 기회가 있을 것을 믿었다. 그는 일본군에 잘보이기 위해 필리핀군의 항복을 권유하는 라디오 방송을 했고, 이런 시도를 통해 예비정부에 참여하려고 했다. 일본은 한때 아기날도를 괴뢰정부의 수반으로 삼을 것을 고려했으나, 최종적으로는 호세 라우렐(Jose P. Laurel)을 선택했다. 19431014일 일본은 라우렐을 대통령, 베니그노 이키노(Benigno S. Aquino)를 부통령으로 하는 공화국을 출범시켰다. 필리핀 역사에서 이를 제2공화국이라고 하는데, 일본군의 괴뢰정부에 지나지 않았다.

일본에 부역하는 정권은 필리핀인의 지지를 얻지 못했다. 다수의 필리핀인들은 항일운동에 뛰어들었고, 미군 패잔병도 여기에 가담했다. 호주로 주둔한 연합군은 항일 게릴라들에게 무기를 지원했다.

일본군에게 필리핀은 지옥이나 다름 없었다. 1942년부터 1844년까지 필리핀인들의 지하운동, 게릴라투쟁으로 일본군은 무려 50만명이 사망했다. 이는 중일전쟁(1937~1945)에서 사망한 일본군 45만명보다 많은 숫자다. 이는 필리핀인들의 항일투쟁이 격렬했다는 증거이기도 하거니와 친일 괴뢰정부가 무기력했음을 보여준다.

194410월 맥아더 장군이 이끄는 미 6군이 레이테만에 상륙하면서 전세는 반전되었고, 마닐라 전투에서 필리핀인은 약 100만명이 사망했다. 이런 희생을 치르면서 필리핀은 반일투쟁을 벌였으며, 이번엔 미군을 해방자로 맞았다. 1945년 봄, 필리핀은 미국에 의해 완전하게 탈환되었다. 라우렐과 아키노 등 부역자들은 일본이 제공한 비행기를 타고 일본으로 도주했다. 일본이 항복한지 이틀후인 1945817일 라우렐은 일본 나라의 호텔에서 자신의 괴뢰정부 해체를 선언했다.

 

1946년 7월 4일 필리핀이 381년만에 독립했다. 이날 미국 성조기가 내려가고 필리핀 국기가 게양되고 있다. /위키피디아
1946년 7월 4일 필리핀이 381년만에 독립했다. 이날 미국 성조기가 내려가고 필리핀 국기가 게양되고 있다. /위키피디아

 

한편 미국으로 망명했던 자치정부의 케손 대통령은 1944년에 뉴욕에서 사망하고, 부통령이던 오스메냐가 대통령직을 수행했다. 필리핀의 독립은 일본군이 쳐들어오기 전에 194674일로 예정되어 있었고, 돌아온 미군은 이 약속을 지켰다. 미국은 1946423일에 완전한 독립정부를 이끌 대통령의 선거를 실시했다.

국민당에선 세르지오 오스메냐를 내세웠고, 새로 창당한 자유당에서는 마누엘 로하스(Manuel Roxas)가 출마했다. 오스메냐는 대중적 인지도가 떨어졌고, 투표에서 로하스가 53.93%를 얻어 45.72%를 얻는 오스메냐를 누르고 독립국 필리핀의 대통령이 되었다. 로하스는 미국이 약속한 대로 194674일 독립국 대통령에 취임했다. 필리핀 역사에서 이 때부터 제3공화국이라고 한다. 15654월 스페인인의 첫 식민 이래 미국, 일본을 거치며 381년만에 외세의 지배애서 벗어나 완전한 독립을 이룬 것이다.

 


<참고한 자료>

Wikipedia, History of the Philippines 

Wikipedia, Second Philippine Republic 

Wikipedia, Manuel Roxa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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