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리핀史②…스페인, 루손섬 차지하다
필리핀史②…스페인, 루손섬 차지하다
  • 김현민 기자
  • 승인 2024.02.22 12: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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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65년 첫 정착…포르투갈, 현지 원주민, 중국과 일본 해적 차례로 제압

 

1521년 페르디난드 마젤란이 왔을 때, 필리핀엔 뚜렷한 국가체제가 없었다. 원주민들이 부족 단위로 할거했고, 중국인과 일본인으로 구성된 해적들이 섬 주변을 어슬렁거리며 토색질을 했다. 스페인 원정대는 소수였지만 빠른 시간에 가장 강력한 세력으로 등장했다. 그 이유는 불을 뿜어내는 머스킷 총과 인류 역사상 처음으로 지구를 도는 첨단 항해기술을 보유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처음에 남아메리카 남단의 마젤란 해협을 돌아 머나먼 바닷길을 항해했다. 곧이어 그들은 멕시코의 뉴스페인에서 출발하는 항로를 개척해 스페인 본국에서의 도달 거리를 좁혔다. 1530년대에 멕시코 태평양 연안에 건설한 아카풀코가 필리핀으로 가는 거점이 되었다.

당시 스페인과 포르투갈은 교황의 추인 하에 지구를 반으로 갈라 나눠 먹은 토르데시야스 조약을 체결한 상태였다. 이 조약에 의해 필리핀은 어느 나라에 속하는지의 문제가 대두되었다. 1494년 이 조약을 체결할 당시만 해도 지구는 평평한줄 알았다. 갈릴레이 갈릴레오가 지동설 포기 서약을 한 때가 1616년이었으니, 두 카톨릭 국가는 세상이 납작하다고 생각하고 경계를 그었던 것이다.

1524년 두 왕국의 대표들은 스페인 사라고사에서 만났다. 지구가 둥근줄 알았다면 토르데시야스 조약의 경계의 반대편에 금을 그으면 공평할 터인데, 그땐 그럴 지리적·천문학적 지식이 없었다. 포르투갈은 향료 섬인 말루쿠 제도에 연연했고, 그 바깥으로 스페인이 가져가도 좋다고 했다. 협상은 지지부진하다가 1529년에야 말루쿠와 필리핀 사이 동경 169°에서 경계가 그어졌다. 이를 사라고사 조약이라고 한다. 스페인은 아시아에서 경도로 22°의 폭 만큼 더 가져갔다. 스페인은 자기네 사람이 살지 않은 상태에서 땅의 경계부터 그은 것이다.

 

필리핀 보홀의 혈맹 기념비 /Guide to the Philipppines
필리핀 보홀의 혈맹 기념비 /Guide to the Philipppines

 

스페인 사람이 필리핀에 처음으로 정착한 것은 마젤란 도착 이후 40여년이 지난 1565년이다.

미겔 로페스 데 레가스피(Miguel López de Legazpi, 1502~1572)는 국왕의 명령을 받고 5척의 배에 500명의 병사를 태우고 뉴스페인을 출항했다. 석 달을 항해한 끝에 필리핀의 보홀(Bohol) 섬에 도착했다. 보홀의 추장이 정착지로 세부(Cebu)를 추천하며 자신이 안내를 맡겠다고 했다. 미겔 로페스와 보홀의 추장 다투 시카투나(Datu Sikatuna)는 손에서 피를 내 잔에 따르고 마시는 혈맹식(Blood compact)을 가졌다.

스페인과 보홀의 연합군은 세부를 쳐들어갔다. 1565427일 그들은 세부에 도착해 현지 원주민을 제압하고 최초의 스페인 정착지를 건설했다. 마을 이름을 예수의 가장 신성한 이름의 마을’(Villa del Santisimo Nombre de Jesús)이라고 지었다. 스페인은 이 곳을 동인도( East Indies)라고 부르고 뉴스페인 부왕의 아래에 두었다. 스페인령 동인도는 괌, 마리아나 제도, 카롤라이나 제도, 팔라우를 포괄하며, 미겔 로페스는 초대 총독이 되었다.

스페인군 원정로 /위키피디아
스페인군 원정로 /위키피디아

 

스페인 정착지의 첫 번째 도전 세력은 포르투갈이었다. 포르투갈 국왕은 세부에 스페인 식민지가 건설되었다는 보고를 받고 곤살로 페레이라(Gonzalo Pereira)에게 그곳을 뺏으라고 명령했다.

1568918일 페레이라는 말루쿠 식민지에서 병력을 보강해 세부를 포위하고 물러날 것을 요구했다. 미겔 로페스는 거부했다. 포르투갈 함대는 공격을 하지 않고 포위를 통한 장기전을 펼쳤다. 식량공급을 차단해 항복을 유도할 요량이었다. 하지만 포르투갈측이 먼저 무너졌다. 장티푸스가 번졌기 때문이다. 해를 넘겨 156911일 포르투갈 군은 철수했고, 더 이상 세부를 공격하지 않았다. 포르투갈이 뒤늦게 사라고사 협약을 인식한 것일까. 어쨌든 1580년 포르투갈은 스페인에 합병되었고, 필리핀에 대한 영유권 논란은 더 이상 없었다.

 

1570년 로페스는 120명의 병력을 보내 북쪽 지역을 탐사하도록 했다. 탐사대는 58일 지금의 마닐라만을 발견했다. 그곳은 항구 조건이 좋았고, 중국과 교역하는 장소로 적합하다는 판단이 섰다. 현지 무슬림 추장도 우호적이었다. 하지만 인근의 다른 부족들은 적대적이었다.

1571년 멕시코에서 증원군 250명에 원주민 병사 500명이 충원되엇다. 로페스는 병들어 움직이지 못했지만 부하들에게 출동명령을 내렸다. 마닐라가 접수되었고, 원주민 부족들과 평화조약을 체결했다. 로페스는 마닐라를 스페인령 필리핀의 수도로 정한 후 그의 소명을 다했다.

 

원주민들에겐 스페인 군대도 중국 해적, 왜구와 얼굴 모습이 다른 서양 해적일 뿐이다. 카톨릭으로 무장한 백인 해적들은 동양인 해적들과 한판 붙어야 할 상황이었다.

당시 명나라는 왜구에 시달렸다. 왜구는 흔히 일본 해적으로 알려져 있는데, 당시 중국인 왜구도 있었다. 그 중 린펑(林鳳)이란 중국이 해적 무리를 이끌었다. 그는 림아홍(林阿鳳)으로 더 잘 알려져 있는데, 일본 해적들과 손잡고 광둥과 푸젠 일대에서 노략질을 일삼았다. 명 조정이 군대를 투입해 해안의 해적들을 소탕하자 린펑 무리들은 1571년 필리핀 루손섬의 일로코스수르(Ilocos Sur)에 새로운 근거지를 만들고, 중국 해안을 돌아다니며 약탈했다.

이 시기에 스페인이 루손섬에 마닐라를 건설하던 때였다. 린펑은 스페인과 무역을 하던 중국 상선을 나포했다. 그 상선에는 엄청난 금은 보화가 쌓여 있었다. 린펑은 스페인의 본거지를 약탈하면 수많은 금과 은을 얻을 것이라고 믿고, 마닐라 공격을 시도했다. 그에게는 70척의 배가 있었고, 그를 따르는 중국 해적이 3,000명이나 되었다. 여기에다 일본 왜구 400명이 그와 연대하고 있었다.

린펑은 스페인 사람들이 독실한 카톨릭 교도임을 이용했다. 15741130일 스코틀랜드 수호성인 성 안드레이를 기리는 축제의 날을 택해 전날 야간에 마닐라를 기습공격했다. 린펑은 착각했다. 서양인의 무기의 화력을 간과했다. 700명의 중국 해적들은 대나무로 된 투구를 쓰고, 솜털을 가뜩 넣은 갑옷, 긴창, 화승총(조총), 전투용 도끼, 칼로 무장했다. 그들은 맨발로 살금살금 초소를 향했다. 초소의 병사들은 완강하게 저항했고, 그 바람에 스페인군 본대는 전투준비를 마쳤다. 스페인 군대는 수는 적었지만 화력이 뛰어났다. 중국 해적이 80명 죽었지만, 스페인은 14명의 희생자를 냈을 뿐이다. 중국 왜구들은 타고 왔던 배를 타고 황급히 도주했다. 린펑 일당은 팡가시난(Pangasinan)에 거점을 만들고 독립권력을 형성했다.

이듬해인 15753월 스페인은 팡가시난을 기습공격, 요새를 함락했다. 4개월후 린펑 일당은 또다른 곳으로 도주했고, 그후 그들의 자취가 추적되지 않는다.

 

세부의 미겔 로페스 동상 /위키피디아
세부의 미겔 로페스 동상 /위키피디아

 

루손섬 북동부 카가얀 지방에는 일본 로닌(浪人)으로 구성된 일본 왜구들이 원주민을 굴복시키고 활개를 치고 있었다. 필리핀 총독 곤살로 론키요는 스페인 왕에게 이렇게 보고했다. “왜놈들은 무도하기 짝이 없습니다. 그들은 ,포르투갈에게서 얻은 머시킷총으로 무장하고 방탄복을 착용했습니다.”

카가얀 왜구의 두목은 타이 후사(Tay Fusa)라고 전해진다. 총을 보유했지만 배는 스페인함대에 비해 수준이 낮았다. 정크선 1대에 나룻배 수준의 삼판(sampan) 18대가 전부였다. 1582년 카가얀 계곡에서 스페인군과 왜구가 충돌했다. 전투는 쉽께 끝났다.

스페인은 중국과 일본 해적들을 쫓아내고 필리핀 제도의 가장 큰 섬인 루손섬을 차지하게 되었다.

 


<참고한 자료>

Wikipedia, History of the Philippines 

Wikipedia, Miguel López de Legazpi 

Wikipedia, Blockade of Cebu 

Wikipedia, Limahong 

Wikipedia, 1582 Cagayan battl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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