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리핀사⑨…남부 모로지역
필리핀사⑨…남부 모로지역
  • 김현민 기자
  • 승인 2024.03.09 13: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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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페인 지배기에 독립국 유지, 미국 시기에 교육 강화…일본군 몰살의 기록도

 

모로(Moro)는 인종이 아니라, 필리핀 남부의 무슬림을 일컫는 용어다. 인종적으로는 루손섬과 인도네시아, 말레이시아와 같은 말레이계이며, 세부적으로는 13개 종족으로 나눠진다. 모로라는 용어는 스페인 사람들이 북아프리카의 모로코 무슬림을 부르는 말에서 나왔는데, 영어로 무어인(Moors)이다. 이베리아반도의 무슬림을 아프리카로 내쫓고 건국한 스페인이 루손섬에 식민지를 건설하고 무슬림들을 모로라고 했다. 피부색깔도 비슷하다고 한다. 이들이 거주하는 지역을 모로랜드(Moro Land)라고 하며, 필리핀의 민다나오, 술루열도, 팔라완이 여기에 해당한다.

필리핀에 무슬림이 들어온 것은 13세기로 알려져 있다. 15세기에 필리핀 남부는 거의 이슬람화되었고, 16세기엔 루손섬으로 확장되고 있었다. 스페인 사람들이 1565년 세부 섬에 최초로 정착한 이후 1571년에 루손섬에 마닐라를 건설했다. 스페인 정복자들이 요새를 건설할 무렵, 루손섬에는 국가가 형성되어 있질 않았고, 바랑가이(barangay)라는 촌락, 종족 중심의 원시공동체로 분산되어 있었다. 소수의 스페인 사람들이 루손을 쉽게 정복한 것은 그곳에 강력한 권력집단이 없었기 뗘문이다.

그에 비해 남부 모로랜드엔 무슬림들이 국가를 형성하고 있었다. 술루(Sulu) 술탄국, 마긴다나오(Maguindanao) 술탄국, 라나오(Lanao) 연맹체 등이 버티고 있었다. 이들 중 술루는 보르네오 북부까지 지배할 정도로 강력했다. 술루는 노예무역을 하면서 경제력을 키웠고, 중국의 명청에 조공하고 영국과 스페인 사이에 줄타기 외교를 벌이기도 했다.

모로인들은 호칭에서부터 차별을 받았고, 서양인들이 쏘아대는 총포의 과녁이 되었다. 이베리아 반도애서 무슬림을 내쫓고 나라를 세운 스페인은 필리핀에서 제2의 리콩키스타(Reconquista)를 실현하는 의미로 무어인을 공격했다. 신교국가인 네덜란드와 영국은 인도네시아와 말레이시아에서 종교적 강요를 하지 않은데 비해 카톨릭 국가였던 스페인과 포르투갈은 무슬림에게 개종을 강요했다. 노예사냥, 절두의 풍습 등은 카톨릭의 관점에서 야만인이나 다름 없었다.

 

19세기의 필리핀 남부 형세 /위키피디아
19세기의 필리핀 남부 형세 /위키피디아

 

마닐라를 건설한 후 스페인 정복자들은 1578년 곧바로 모로랜드에 대한 대규모 공세에 들어갔다. 스페인 원정대는 술루의 중심지였던 홀로 섬을 정복하는데는 성공했다. 하지만 그들이 물러갔을 때 피해 있던 모로족들은 해안의 요새를 공격했고 이내 스페인 점령지는 모로족에 접수되었다.

스페인의 공격에 술루도 무장을 했다. 중국 상인들이 무기를 거래했고, 술루는 그들이 붙잡은 노예를 팔았다. 서양과 중국, 동남아에 무역이 활발해 지면서 뱃일을 하는 노예의 수요가 증가했고, 술루는 동남아 해안을 돌아다니며 인간사냥을 통해 노예를 잡아들여 매매했다. 술루는 또 상선대를 편성해 홀로 섬을 중심으로 마카오, 보르네오, 싱가포르 등 아시아 지역의 여러 항구를 다녔다. 술루는 한때 무장함대 40~50, 선원 2,500~4,000명을 보유한 해상왕국이었다.

하지만 300년의 기나긴 전쟁에 필리핀 남부의 무슬림은 점차 스페인에 먹혀 들어갔다. 스페인은 모로인들을 개종시키거나 루손섬의 카톨릭 신자들을 이주시킴으로써 모로랜드에서 가장 큰 민다나오 섬의 무슬림 비율을 떨어뜨렸다.

스페인 지배 막바지였던 1887년 스페인군은 기습적으로 슬루의 수도 마임붕을 공격해 술루의 왕(술탄)을 굴복시켰댜. 술루는 홀로 섬에 스페인 요새를 짓도록 허용하면서 왕실만 존속하는 형태의 보호령으로 떨어졌다.

 

스페인군에 소속된 기독교 필리핀인 /위키피디아
스페인군에 소속된 기독교 필리핀인 /위키피디아

 

몇 년이 지나 1898년 필리핀의 지배권이 스페인에서 미국으로 이양되었고, 모로랜드도 미국령이 되었다. 미국 지배 초기에 루손섬에는 에밀리오 아기날도를 중심으로 하는 필리핀 독립국가(1공화국)가 수립되었다. 미국은 루손섬과 모로랜드에서 두 개의 전쟁을 치르기엔 부담을 느꼈다.

1899년 미국 국무장관 존 헤이는 무슬림의 종주국인 오스만투르크에게 술루를 설득해 달라고 요청했다. 오스만은 당시 여러 전쟁에서 패전해 쇠약해 있었기 때문에 미국의 도움이 필요했다. 오스만의 술탄 압둘 하미드(Abdul Hamid) 2세는 모로의 술탄에게 편지를 써 미국에 복종하라고 권유했다. 당시 오스만의 술탄은 무슬림 세계에서 정신적 지도자인 칼리프 역할도 하고 있었다. 술루는 종주국의 지시에 따라 루손섬의 독립운동에 가담하지 않았다.

술루의 술탄은 미국의 지배에 저항하지 않는 대신에 자치를 대폭 허용해달라고 요구했다. 미국도 이를 받아들여 술루 술탄과 미국 장군 존 베이츠 사이에 키람-베이츠 조약이 체결되었다. 하지만 루손섬의 독립운동을 진압한 후 미국의 마음이 달라졌다. 미국은 필리핀 식민지에 노예제도를 철폐하고 교육을 확대하겠다고 밝혔다. 민다나오와 모로랜드도 예외가 아니었다. 노예사냥으로 먹고살고, 이슬람 율법을 교육하던 무슬림들이 크게 반발했다.

 

190238일 민다나오섬 파랑에서 미군병사 하나가 누군가의 공격을 받아 사망했다. 3일후 미군 한명이 더 사망했고, 그때 암살자가 모로인이라는 사실이 밝혀졌다. 미군은 모로족에게 대대적인 공격을 감행했다. 모로족의 저항은 끈질겼다. 1913년 홀로섬의 버드박삭 전투(Battle of Bud Bagsak)를 계기로 모로족의 저항은 꺾였다.

미국은 모로의 땅에 비무슬림 교과를 가르치는 현대식 공립학교를 확대하고 술탄과 다투와 같은 지배자들을 없애 버렸다. 술루 술탄국도 이때 종식되었다;

미국은 민다나오에 대한 신속한 경제개발을 추구하며 루손섬의 기독교인을 대규모로 이주시켰다. 1918년 민다나오에 모로인보다 기독교인의 인구비율이 같아졌다. 이후 민다나오엔 기독교 인구가 더 늘어나, 1939년 센서스에서 모로 인구는 755,189명으로 전체의 34%를 차지한데 비해 기독교인구는 1489,232명으로 무슬림 인구의 2배로 불어났다.

 

모로 반군과 전투를 벌이는 미군 /위키피디아
모로 반군과 전투를 벌이는 미군 /위키피디아

 

1942년 일본군이 필리핀을 점령한 후 모로 일대도 일본군의 손에 넘어갔다. 일본군은 모로랜드에 대한 공부를 하지 않고 들어왔다. 그들은 다만 모로 일대를 말레이시아, 인도네시아로 건너가는 징검다리로서 군사적 기지로 활용하려 했고, 모로인들의 종교와 풍습에 관해서는 관심이 없었다.

일본군은 들은 초기에 모로인들을 순응시키려고 잔인한 방법을 동원했다. 모로인들은 일본군에 저항했다. 무슬림들은 과거의 적이었던 미국, 카톨릭과도 손을 잡고 알본군과 맞서 싸웠다. 모로인들의 반격이 전개되면서 홀로섬에서는 주둔군의 97%가 살해되었다. 집단학살을 피해 밀림으로 도망쳤다가 살아남은 후지오카 아키요시는 회고록에서 당시의 참상을 기록으로 남겼다. 일본군 1,000명이 죽어나갔다.

모로인들의 영웅적인 반일 항쟁은 미국으로부터 두둑한 보상금을 지급받았고, 1946년 필리핀 독립 후에도 기독교 정치인들에게 인정을 받았다. 하지만 그들은 일본군에서 뺏은 무기를 가지고 있었고, 무슬림 독립국을 원했다. 필리핀 독립 후에도 기나긴 모로전쟁이 이어졌다.

 


<참고한 자료>

Wikipedia, SpanishMoro conflict 

Wikipedia, Moro Rebellion 

Wikipedia, Moros during World War II 

Wikipedia, Moro peop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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