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리핀사⑦…미국에 속은 아기날도
필리핀사⑦…미국에 속은 아기날도
  • 김현민 기자
  • 승인 2024.03.04 11: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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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스페인 전쟁 와중에 독립선언…미군 진압으로 독립정부 와해, 자치정부로 이행

 

18984월 미국과 스페인 사이에 전쟁이 터졌다. 미국은 스페인의 아시아 식민지인 필리핀에 눈독을 들였다. 바로 직전에 필리핀 독립운동 지도자 에밀리오 아기날도(Emilio Aguinaldo)는 스페인군의 진압작전에 궤멸의 위기에 몰려 80만 페소의 보상금을 받는 조건으로 저항을 멈추고 홍콩으로 망명했다. 그는 홍콩과 싱가포르를 전전하며 재기를 도모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 미국측으로부터 연락이 와서 1898422일 싱가포르에서 스펜서 프랫(E. Spencer Pratt) 공사를 만났다. 아기날도는 이때 프랫 공사가 해군 아시아함대 사령관 조지 듀이(George Dewey)와 전보로 연락해 필리핀의 독립을 보장했다고 주장했다. 아기날도는 미국 공사와 제독의 구두약속이 미국 정부나 다름 없다는 말을 믿고 문서화하지 못했다고 했다.

듀이 제독이 이끄는 미국의 아시아함대는 51일 마닐라만에서 스페인 전함을 전멸시켰다. 아기날도는 독립을 보장해 준다는 미국 외교관의 말을 철석같이 믿고 519일 미국 함선을 타고 필리핀으로 돌아갔다.

612일 아기날도는 동지들을 모아 독립을 선언하고 623일 혁명정부를 수립했다. 아기날도는 한달도 안 되어 12,000명의 군대를 조직했다. 필리핀군은 무기면에서 보잘 것 없었지만 마닐라 외곽지역은 장악할수 있었다. 스페인군은 마닐라 성곽 내 인트라무로스(Intramuros)를 방어하고 있었다.

813일 미군과 필리핀군의 연합작전으로 인트라무로스에 대한 대대적인 공격이 전개되었다. 13천명의 스페인군은 몇시간 버티지 못하고 이내 항복했다. 미군은 성내로 진입했지만 필리핀군의 진입을 막았다. 이때부터 미국의 태도가 달라지기 시작했다.

전후 처리를 위한 회담이 파리에서 열렸다. 아기날도는 필리핀측 대표를 파리에 보냈지만, 미국과 스페인으로부터 필리핀 혁명정부가 승인을 받지 못했기 때문에 협상장에 참여할수 없다는 답변이 돌아왔다. 필리핀이 배제된채 미국과 스페인은 18981210일 파리협정을 체결했다. 미국이; 2,000만 달러를 주고 스페인에게서 필리핀을 매입하는 조건에 두 나라가 합의했다. 스페인은 필리핀 통치권을 독립운동 세력에 이양하지 않고 미국에 팔아넘긴 것이다.

파리조약으로 미국은 필리핀의 주권을 넘겨받았고, 아기날도의 혁명정부는 부정되었다. 미국은 아기날도를 이용했을 뿐이고, 아기날도는 미국 공사에 속아 넘어간 것이었다.

 

1901년 체포되어 미군 함정을 타고 있는 아기날도. /위키피디아
1901년 체포되어 미군 함정을 타고 있는 아기날도. /위키피디아

 

그렇다고 아기날도의 혁명정부는 국가건설을 중단하지 않았다. 9월에 138명의 제헌의회를 구성하고 헌법 제정에 착수했다. 해를 넘겨 1899121일 필리핀 독립세력은 불라칸주 말롤로스에서 필리핀 공화국 수립을 정식 선포했다. 이 정부를 필리핀 역사에서 제1공화국, 또는 말롤로스 공화국(Malolos Republic)이라고 한다. 루손섬에 두 개의 정부가 섰다. 군정과 말롤로스의 필리핀 정부다.

189924일 마닐라 근교 검문소에서 미군 병사들이 검문에 응하지 않은 필리핀 병사 2명을 사살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 소식을 전해들은 아기날도는 미국과의 평화와 우호관계는 깨졌다. 미국은 적으로 규정한다.”고 선언했다. 다음날 필리핀의 이시도로 토레스 장군은 전날의 충돌이 우발적이었으므로 적대관계를 종식하고 중립지대를 만들자고 미군측에 제안했다. 이에 미군의 E. 스티븐 오티스 장군은 제안을 거절하고 이미 전투가 시작되었다. 돌아가라고 했다.

미군과 필리핀군 사이에 전쟁이 시작되었다. 이른바 필리핀 독립전쟁 또는 미국-필리핀 전쟁이다. 숫적으로 필리핀군이 압도적이었지만 화력에서는 미군을 당해내지 못했다.

개전 한달째에 마닐라가 완전하게 미군의 수중에 떨어졌다. 아기날도 정부는 본거지를 이동해 가며 저항했다. 미군은 필리핀군을 지방으로 몰아붙였다. 62일 필리핀군대의 신뢰를 받던 안토니오 루나 장군이 저격되고, 122일 델 필라르 장군과 그의 부하들이 궤멸했다. 미군은 전략촌을 만들어 필리핀인을 대거 이주시키고 게릴라들과의 접촉을 차단했다.

미군은 아기날도의 체포에 주력했다. 1901323일 이사벨라주의 한 마을에서 주민의 신고를 받고 출동한 미군에 의해 체포되었다.

아기날도는 오래 버티지 못했다. 41일 그는 미 합중국을 인정하고 미국에 충성하겠다고 선언했다. 419일 아기날도는 미국에 항복했음을 선언하고 부하들에게 무기를 내려놓고 전쟁을 중단하라고 명령했다. 이런 조치로 아기날도는 미군정으로부터 사면을 받고 카비테에서 조용하게 생활했다.

그의 체포는 필리핀군에 충격을 주었다. 하지만 미겔 말바르(Miguel Malvar) 장군은 아기날도의 뜻에 반해 부하들을 이끌고 저항을 이어나갔다. 말바르도 1902416일 투항하고 말았다. 휘하 병력 3,000명도 항복했다. 일부 소수의 저항은 있었으나, 이로써 필리핀 독립의 무장투쟁은 소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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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살 이상이면 죽여라”고 했다는 제이컵 스미스 장군의 명령을 풍자한 뉴욕저널의 만평(1902. 5. 5.) /위키피디아
“열살 이상이면 죽여라”고 했다는 제이컵 스미스 장군의 명령을 풍자한 뉴욕저널의 만평(1902. 5. 5.) /위키피디아

 

3년여에 걸친 필리핀 독립전쟁에서 미군은 자애롭지 않았다. 미국의 뉴욕저널은 필리핀 독립군을 토벌하던 제이컵 스미스 장군이 열살 이상이면 죽여라고 한 명령을 풍자한 만평을 실었다. 민주적이고 반제국주의라던 미국은 아시아에서 가장 먼저 민주헌법을 제정한 독립국을 무참하게 붕괴시킨 것에 대한 일말의 반성도 하지 않았다. 전쟁에서 미군 사망자는 4,200명이었던 것에 비해 필리핀 병사의 사망자는 2만여명에 달했다. 무장하지 않은 주민 사망자는 15~20만명에 이르는데, 대부분이 전염병, 기아로 죽었다고 한다.

이렇게 참혹하게 독립운동을 진압한 후 미국은 필리핀에 자애로운 동화”(Benevolent assimilation)라는 명분을 내걸고 유화정책을 추구했다. 그동안 웨슬리 메릿, E. 스티븐 오티스, 아서 맥아더(더글러스 맥아더 장군의 아버지)으로 이어지는 군정총독을 끝내고, 190173일 윌리엄 태프트(후에 대통령)를 초대 민정총독을 임명했다.

 

필리핀 하원에 참석, 연설을 하고 있는 윌리엄 하워드 태프트 총독 /위키피디아
필리핀 하원에 참석, 연설을 하고 있는 윌리엄 하워드 태프트 총독 /위키피디아

 

1902년 시어도어 루스벨트 대통령은 쿠퍼법에 서명, 필리핀에 입법부 기능을 수행할 하원의 설립을 허용했다. 1907730일 쿠퍼법(Cooper Act)에 따라 필리핀 초대 의회선거가 실시되어 80명의 의원이 선출되었다. 29세의 세르지오 오스메냐(Sergio Osmeña),가 하원의장에 선출되었으며, 마누엘 케손(Manuel L. Quezon)이 다수당인 국민당 대표가 되었다.

1916년 미국의 우드로 윌슨 대통령은 입법-행정-사법의 3권 분립을 토대로 한 필리핀 자치법에 서명했다. 존스법이라는 이 법에 따라 상하양원 의원이 선출되어 그해 10월 새 의회가 개원했다. 새 의회에는 케손이 상원의장, 오스메냐가 하원의장에 선출되었다.

행정부에는 교육부 장관을 제외하고 전 각료가 필리핀인으로 임명되었다. 미국인 총독 아래에 필리핀들이 입법부를 구성하고 행정부와 사법부의 다수를 점하는 독자적인 통치체제가 형성되었다. 1918년 프랜시스 해리슨 총독은 총독을 의장으로 하고 상원의장, 하원의장, 각부 장관으로 구성된 국가협의회를 설치했다. 이러한 형태의 섬 정부(Insular Government)1935년까지 지속되었다.

 


<참고한 자료>

Wikipedia, History of the Philippines 

Wikipedia, Emilio Aguinaldo  

Wikipedia, First Philippine Republi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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