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리핀사⑥…민족주의 태동
필리핀사⑥…민족주의 태동
  • 김현민 기자
  • 승인 2024.03.02 18: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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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지식인층이 민족의식 자각…온건노선 실패하며 급진적 무장투쟁으로 전환

 

1762~64년 영국 해군이 마닐라를 침공했을 때 필리핀 사람들은 지배자 스페인이 등을 돌려 도망치는 모습을 보았다. 그 틈에 민중반란이 일어나고 중국인들은 영국에 협조하고 무슬림 세력은 외세의 도움으로 독립을 하려 했다. 영국이 물러난 후 스페인은 고개를 든 세력을 가차 없이 처단했지만 전성기가 지난 늙은 제국은 필리핀 토박이들에게 조금씩 양보를 하지 않을수 없었다.

1821년 스페인의 가장 중요한 식민지 멕시코가 독립하고 남미가 떨어져 나갔다. 필리핀은 쿠바와 함께 주요한 식민지로 남게 되었다. 스페인은 그동안 멕시코의 뉴스페인을 통해 간접통치하던 필리핀을 직접통치로 전환했다.

스페인은 필리핀에 투자금를 많이 부었다. 1863년 이사벨라 2세 여왕은 유화책의 일환으로 필리핀에 공립학교를 지어 원주민들에게 교육을 장려했다. 식민당국은 중국인들을 견제하기 위해 유럽인들의 피가 섞인 메스티조들을 대우했고, 그들 중에 부자들이 생겨났다. 필리핀 사람들은 교육장려책에 힘입어 자녀들에게 공부를 가르쳤다. 1869년 수에즈 운하가 뚫리고 유럽과의 왕래가 쉬워지면서 돈 있는 필리피노 가운데 아들을 유학보내는 경우가 많았다. 이들 지식층이 일루스트라도스(ilustrados)라는 새로운 계층을 형성했다. 이 신지식인층이 피지배 필리핀인을 자각하고 민족의식을 고양하게 된다.

 

1872년 카비테 폭동을 선동한 혐의로 사형을 당한 원주민 출신 세 신부. 고메스(가운데), 부르고스(오른쪽), 자모라(왼쪽)의 이니셜을 따 곰부르자(Gomburza)라고 불렸다. /위키피디아
1872년 카비테 폭동을 선동한 혐의로 사형을 당한 원주민 출신 세 신부. 고메스(가운데), 부르고스(오른쪽), 자모라(왼쪽)의 이니셜을 따 곰부르자(Gomburza)라고 불렸다. /위키피디아

 

필리핀 식민지에 카톨릭 신부는 영향력이 컸고 마을 단위에선 지방행정까지 도맡았다. 스페인 사람들만이 사제를 맡다가 필리핀인, 메스티조들도 신학을 공부해 신부가 되었다. 스페인 수도회는 주임사제로 승진시킬 때 스페인인과 필리핀인에 대해 차별을 두었다. 이에 고메즈(Mariano Gomez), 호세 부르고스(José Burgos), 하신토 자모라(Jacinto Zamora) 세 필리핀 신부는 인종차별을 철폐하는 교회 개혁 운동을 벌였다.

1872120일 마닐라의 군항 카비테에서 노동자 폭동이 일어났다. 식민당국은 세 신부를 배후로 몰아 같은 해 2173명의 신부 모두를 처형했다. 세 신부는 필리핀인들의 추앙을 받았는데 이들의 이름 앞자를 따 곰부르자(GOMBURZA, GOMez + BURgos + ZAmora)라고 불렀다. 곰부르자의 처형은 필리핀 민족의식을 자극하는 계기가 되었다.

 

호세 리잘 /위키피디아
호세 리잘 /위키피디아

 

1880년대가 되면서 일루스트라도스 집단은 페닌술라레스(Peninsulares)라 불리는 스페인 사람들에게 대항해 계몽운동을 펼쳤다. 이들은 페닌술라레스를 이길 힘을 갖지 못했기 때문에 평화적이고 온건한 방법으로 목적을 이루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들이 펼친 운동은 프로파간다(Porpaganda) 운동이라고 했는데, 정치·농업·교육의 개혁과 스패인 사제 추방등을 요구했다. 그들은 필리핀에서 태어난 모든 사람을 필리피노라고 부르며, 정체성을 확인했다.

1882년 마르셀로 델 필라(Marcelo H. del Pilar)가 최초로 타갈로그어 일간지 연대’(La Solidaridad)를 창간해 수도회의 정치 지배를 비판했다. 호세 리살(José Rizal)1886년 첫 소설 나에게 손대지 말라’(Noli me tangere)에 이어 1887체제전복’(El filibusterismo)을 출간, 개혁운동을 대변했다. 그의 사상은 필리핀 독립운동의 사상적 기반을 이루었는데, 1892년 스페인 당국은 그를 체포해 민다나오 섬의 감옥에 넣었다. 프로파간다 운동의 실패는 온건방식의 한계를 드러냈고 운동가들은 급진적 운동을 지향하게 되었다.

 

1892년 호세 리살이 체포된 직후에 조직된 단체가 카티푸난(Katipunan)이다. 안드레스 보나파시오(Andrés Bonifacio)가 조직한 이 비밀단체는 가장 위대하고 숭고한 자손 연합이란 의미이며 이니셜로 KKK라고 칭했다. 이들은 무장독립운동을 시작했다. 이들은 1895자유’(Kalayaan)란 이름의 소식지를 발간했다.

18948월 보니파시오는 스페인에 저항해 혁명을 일으키라는 지령을 전국에 하달했다. 하지만 이 정보가 스페인에 알려지게 되어 당국은 가혹한 수사와 검거열풍을 일으켰다. 보나파시아 무리는 어쩔수 없이 830일 무장봉기를 일으켜 혁명운동에 불을 지폈다. 보니파시오가 주도하는 마닐라 시내의 전투는 고전했지만, 아기날도파가 주도한 마닐라 근교 카비테의 투쟁은 비교적 성공했다. 스페인 당국은 혁명 운동을 잠재우기 위해 유배형에 처했던 리살을 마닐라로 소환해 처형했다.

혁명운동에 분파가 생겼다. 지방 조직을 쥐고 있던 에밀리오 아기날도(Emilio Aguinaldo) 무리가 보니파시오 무리에서 분리해 독자적인 세력을 형성했다. 아기날도는 상층 계급을. 보나파시오는 하층계급을 각각 대표했으며, 두 세력의 갈등이 표면화했다.

1897322일 카티푸난 지도부 회의에서 아기날도파가 우세했다. 이기날도는 여러 파벌들의 지지를 모아 혁명정부 대통령으로 선출했다. 패배한 보니파시오 형제는 결별을 알리고 회의장에서 물러났다. 그러자 아기날도는 보니파시오 파의 배신을 우려해 그와 형제를 모두 처형했고, 혁명세력의 전권을 장악했다.

 

1896년 필리핀 혁명운동 기념비(필리핀 대학) /위키피디아
1896년 필리핀 혁명운동 기념비(필리핀 대학) /위키피디아

 

한편 스페인 식민당국은 본국에서 병력을 보충받아 전열을 정비하고 아기날도의 근거지안 카비테를 공격했다. 아기날도는 카비테를 포기하고 불라칸주 산간지역으로 도주했다. 아기날도 파는 그곳에서 헌법을 제정하고 비약--바토’(Biak-na-Bato) 공화국의 수립을 선언하고 아기날도를 대통령으로 선출했다.

하지만 아기날도는 스페인군에 비해 열세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스페인군은 소수화된 게릴리 조직을 압박하며 아기날도에게 휴전을 제의했다. 스페인은 혁명운동을 중단하고 아기날도가 홍콩으로 망명한다면, 금전적으로 약간의 보상금을 주고 무리들을 사면하는 조건을 제시했다. 아기날도는 생존이 급했기 때문에 조건을 받아들였다. 18971214일 양측은 휴전문서에 서명했다. 그는 보상금을 받고 홍콩으로 망명을 갔다. 그는 그 돈으로 무기를 사서 훗날을 기다릴 요량이었다.

하지만 그에게 기회가 일찍 찾아왔다. 미국과 스페인 사이에 전쟁이 터지면서 미국이 아기날도에게 손짓을 해왔다.

 


<참고한 자료>

Wikipedia, Philippine revolts against Spain 

Wikipedia, Philippines 

Wikipedia, History of the Philippines 

Wikipedia, Philippine Revolu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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