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리핀史⑤…영국의 마닐라 점령
필리핀史⑤…영국의 마닐라 점령
  • 김현민 기자
  • 승인 2024.02.26 18: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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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62~64년, 중국과의 교역거점으로 활용…7년 전쟁 끝나며 반환

 

영국이 스페인령 식민지의 수도 마닐라를 점령한 적이 있다. 176210월부터 17643월말까지 16개월, 18개월 간이다. 유럽에서 7년 전쟁(1756~73)이 벌어졌을 때, 스페인의 적이 된 영국이 마닐라를 공격했다.

필리핀은 유럽에서 볼 때 지구의 정반대 편에 있어 교통과 통신이 발달하지 않은 18세기에 어느 나라도 공격이 어려운 곳이었다. 스페인이 적자 투성이인 이 곳을 버리지 않은 것은 멕시코의 뉴스페인과 연결해 태평양 무역의 거점으로 활용하려는 것이었다. 스페인은 아메리카산 은괴 75톤을 지불하면서 필리핀을 유지했다. 아메리카에서 생산된 은의 30%가 중국에서 소화되었다. 마닐라는 뉴스페인의 배수로였다.

영국도 이 이점을 노렸다. 당시 싱가포르와 홍콩이 개척되지 않았을 때였다. 인도에 집중하고 있던 영국은 스페인의 태평양 보물을 낚아채고 중국과의 교역 교두보를 확보하고자 마닐라를 넘보고 있었다.

7년 전쟁 초기에 영국과 프랑스가 적대적 관계에 돌입하자 스페인은 중립을 지켰다. 전황이 영국의 우세로 기울자 스페인은 영국을 견제하기 위해 프랑스 편에 섰고, 영국과 스페인은 17621월에 서로를 향해 선전포고를 하게 되었다. 영국은 스페인의 아메리카 거점인 쿠바 아바나를 공격하기로 의견을 모았다. 아바나는 남미의 물산이 유럽으로 건너오기 전의 집산지였다.

 

윌리엄 드래퍼 /위키피디아
윌리엄 드래퍼 /위키피디아

 

이때 영국의 육군 대령 윌리엄 드래퍼(William Draper)가 마닐라를 점령할 것을 주장했고, 그 안건에 외무부에 전달되었다. 드래퍼의 재안은 공식 작전으로 채택되었고, 영국 정부는 작전 지휘를 드래퍼에게 맡겼다. 드래퍼는 인도 마드라스로 건너와 준장으로 승진했고, 그곳에서 동인도회사의 협조를 받아 마닐라를 침공할 병력을 구성했다. 영국 정부는 마닐라를 점령한 후에 그곳을 통치할 사람으로 동인도회사의 직원 도슨 드레이크(Dawsonne Drake)를 지명해 함께 파견했다.

아바나 공격에 비해 마닐라 공격에는 그다지 많은 병력이 투입되지 않았다. 3척의 구축함, 4척의 수송선을 포함해 도합 13척이 준비되었고, 병력은 6,839명이 소집되었다.

선대는 81일 마드라스를 출항해 922일 마닐라만에 닻을 내렸다. 스페인 총독부는 아무런 대비를 하지 못했다. 설마 영국이 쳐들어올 것으로 예상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당시 마닐라 총독은 마누엘 로호(Manuel Rojo) 대주교가 대행했다. 전임 총독 페드로 마누엘 데 아란디아가 사망하고 후임으로 프란시스코 데 라 토레가 임명되어 필리핀으로 가는 도중에 쿠바에서 영국군에 포로로 잡혔기 때문에 대주교과 총독을 대리하고 있었다.

마닐라 해안에 도착해 드래퍼는 로호 대주교에게 항복을 요구했다. 멕시코 출신 대주교는 전투를 경험한 적이 없었다. 그는 항복을 하려고 했지만 군인들이 강하게 주전론을 펼쳤다. 그러자 영국 전투함은 대대적인 함포사격을 가했다. 2만발의 포탄이 날아갔다. 300명의 병사가 사망하고 400명이 부상당했다. 성벽이 무너지고 수도시설이 파괴되었다. 106일 영국군은 무너진 성벽 사이로 진입해 요새들을 접수했다. 로호 대주교는 항복했다.

마닐라가 함락된 후 영국 병사들의 약탈이 시작되었다. 그들은 마닐라에 보물이 가득할 것이라고 들어왔다. 정복자들은 마닐라의 가정집, 학교, 관공서, 성당에 들어가 만행을 저질렀다. 절도, 방화, 강간, 약취가 거리낌 없이 저질러졌다. 누가 영국을 신사의 나라라고 했는가. 그들은 인도에서 했듯이 마닐라에서도 유럽인을 상대로 야만성을 드러냈다.

마닐라 총독에 내정된 드레이크는 대주교에게 약탈을 중단하는 조건으로 몸값 400만페소를 요구했다. 대주교는 가 돈을 내주었고, 약탈은 40시간만에 중단되었다.

 

1762년 영국의 마닐라 공격도 /위키피디아
1762년 영국의 마닐라 공격도 /위키피디아

 

한편 주교가 항복하기 직전에 마닐라 평의회는 식민지청 간부였던 시몬 데 안다(Simón de Anda y Salazar)를 부총독으로 지명하고 마닐라를 탈출케 했다. 안다는 금은 재화와 주요 문서를 싣고 마닐라를 벗어나 불라칸(Bulacan)으로 도주해 저항군을 조직했다. 그곳도 안전치 않다고 판단해 팜팡가로 옮겼다. 그는 그곳에서 아우구스티누스회 성당의 지원을 받았다. 안다는 로호에게 외적이 침략했을 때 마닐라 평의회의 결정에 따른다는 조례에 따라 자신이 총독이 되었음을 인정해달라는 편지를 보냈다. 로호는 안다의 요구를 거절했다. 이것으로 대주교와 안다의 관계는 끝이 났다.

 

1025일 마닐라의 스페인 식민청 관리들과 거주자들은 모두 영국 국왕에게 충성을 맹세했다. 이어 1029일 로호 대주교는 필리핀이 영국국왕의 영토라는 서류에 서명했다. 이로써 스페인인의 종교활동과 재산권이 보호되고 영국 신민으로서 자유로운 여행이 보장되었다.

112일 드레이크가 영국령 마닐라의 총독에 부임했고, 원정군 사령관이었던 드래퍼는 1112일 소임을 마치고 인도 마드리스로 귀환했다.

드레이크는 400만 페소의 몸값으로도 모자랐다. 점령자들은 스페인 사람들을 마구잡이로 기소해 재판을 걸었다. 재판은 이른바 캥커루 재판, 즉 사적 판단에 의해 결정되었다. 돈으로 죄값을 치르면 형량이 줄어들었다. 이런 식으로 영국 총독부는 아카풀코에서 오는 갈레온선 산티시마트리니다드호와 그 안의 화물을 압수해 버렸다. 값어치로 환산하면 배값이 300만 페소, 화물이 150만페소에 달했다.

 

시몬 데 안다 /위키피디아
시몬 데 안다 /위키피디아

 

영국인의 약탈은 스페인 사람과 필리핀인을 단결시켰다. 시몬 데 안다는 대주교의 거부에도 불구하고 스스로 필리핀 총독임을 선언했다. 안다는 판팡가에서 1면명의 지원병을 모았다. 주로 필리핀 원주민이었다. 그들에겐 머스킷총이 부족했지만 영국군의 행동반경을 마닐라와 그 주변으로 제한할수 있었다. 마닐라를 벗어나면 안다가 총독이었다.

드레이크는 스페인에 의해 체포되어 마닐라에 구금되어 있던 술루의 술탄 알리무드 딘(Alimun Din) 1세를 풀어주어 본국으로 돌려 보냈댜. 술루의 술탄은 감사의 표시로 보르네오 북부 일대를 영국왕실에 할양했다. (이 땅이 영국령이 되었다가 지금 말레이시아의 사바주다.)

 

유럽에서 7년 전쟁은 1762112일에 중단되었고, 전후 처리를 위한 파리조약은 1763210일에 체결되엇다. 당시 유럽에서 필리핀까지 너무 멀었고, 통신시설이라야 배편의 서신이 고작이었다. 필리핀에선 유럽의 전쟁이 끝난줄 모르고 있었고, 파리에서도 종전협상 테이블에 영국이 마닐라를 점령한 사실이 올라오지 않았다. 영국이 마닐라를 접수했다는 소식은 파리조약이 체결된 지 12개월이 지난 17634월에야 런던에 전달되었다. 마찬가지로 유럽의 종전 소식은 1763123일에 마닐라에 전달되었다.

종전 소식을 접하고 영국은 반군 지도자인 안다에게 휴전협상을 시도했으나, 안다는 영국의 속임수로 알고 제안을 거절했다. 그해 1015일에 파리조약문이 영국 총독부에 전달되었으나 안다는 믿지 못했다.

176438일 영국의 리벤지호가 마닐라에 도착해 영국군의 철수 명령을 전달하자 안다도 마침내 유럽에서 전쟁이 끝낫다고 믿게 되었다. 그 사이에 17441월에 스페인 총독 대행을 맡고 있던 로호 대주교가 사망했고, 영국은 안다를 공식적으로 총독으로 인정하게 되었다.

영국은 마닐라의 요새를 안다와 스페인 관리에게 인계하고 330일 마지막으로 철수했다. 안다의 그동안의 행위는 스페인 국왕 카를로스 3세에 의해 추인되었다.

 

영국의 마닐라 점령은 필리핀에 많은 것을 남겼다. 그동안 마닐라는 스페인 사람과 배만 다녔고, 외부 세계와는 철저히 차단되었다. 이후 스페인 식민청은 마닐라항을 개방하게 되었다.

또 필리핀인들은 200년 이상 자기들 머리 위에 군림하던 스페인인들이 다른 서양인에게 무너질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영국 점령기간에 디에고 실랑의 민중반란이 일어나고, 중국인 사회가 영국에 협조하고, 무슬림 왕조인 술루가 영국을 지원하는 일들이 벌어졌다. 영국의 점령은 일시적 사건에 그치질 않고 스페인의 절대적 권위가 무너지며 필리핀 민족주의가 일어나는 역사적 전환점을 제공했다.

 


<참고한 자료>

Wikipedia, British occupation of Manila

영국의 필리핀 점령과 지배 - 7년전쟁의 파편, 권오신, 2012, 강원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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