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해⑮…신라로 가는 길
발해⑮…신라로 가는 길
  • 김현민 기자
  • 승인 2023.09.08 14: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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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해 초기엔 신라와 대립관계…8세기 중엽 이후 상호 인정, 무역로 개설

 

발해는 건국 초기에 신라와 적대적 관계에 있었다. 732년 발해 무왕이 산둥반도 등주를 공격하고, 이듬해 요서지방 마도산(馬都山) 전투에서 당과 발해의 대립은 격화되었다. 당은 신라에 지원을 요청했고 신라는 이에 응해 발해 남부를 공격했지만 실패했다. 대설과 추위 때문이라고 하지만 신라는 발해와의 전쟁보다는 당을 지원함으로써 영토를 확보하고자 하는 게 주목적이었다고 할수 있다. 성덕왕 34(735)에 신라는 당나라로부터 패강(浿江, 대동강) 이남의 땅을 얻어 국경을 안정시켰다. (삼국사기 성덕왕조)

이후 발해와 당은 평화를 평화를 정착하게 된다. 중국 서남쪽에서 토번(吐番)이 세력을 확대했기 때문에 동북지방에선 안정을 꾀할 수밖에 없었다. 735~736년 무렵에 발해와 당 사이에 교류가 재개되었다.

 

일본 오하라(大原)미술관에 보관된 발해 불상부조 /위키피디아
일본 오하라(大原)미술관에 보관된 발해 불상부조 /위키피디아

 

성덕왕(재위 702~737) 이후 신라와 발해 사이에 변화가 엿보인다. 신라에서 발해를 토벌 대상이 아닌 교류의 대상으로 인식의 전환이 나타나게 된다.

신라는 초기에 발해를 번국으로 인식했다는 기록이 있다. 조선초기 학자 서거정이 지은 동문선(東文選)에 최치원이 당 황제에게 올린 사불허북국거상표’(謝不許北國居上表)가 실려 있다. 이 글에서 최치원은 (발해의) 추장 대조영이 비로소 신번(신라)의 제5품 대아찬의 품계를 받았습니다”(其酋長大祚榮 始授臣蕃第五品大阿餐之秩)고 했다. 최치원의 글이 김부식의 삼국사기에 나오지 않기 때문에 불신하는 사람도 있지만, 서거정이 중국 사료를 근거로 동문선을 정리헸으므로 없던 얘기가 아닐 것이란 견해가 많다.

최치원의 발언은 발해 말기인 897년에 발해와 신라 사이에 사신의 윗자리 다툼(爭長事件)을 설명하는 과정에서 나왔다. 한때 신라에서 5품 벼슬을 받던 발해의 사신이 어찌 우리 앞 자리에 앉을수 있느냐고 따져 이겼다는 내용이다. 신라는 고구려 왕족 출신인 안승(安勝)을 보덕국왕에 앉히고 3등급 소판의 자리를 준 것에 비하면 발해 건국자에겐 낮춰 대우한 것이다. 말갈족의 일개 추장 세력 정도로 본 것이다. 신라의 이같은 대우에 대해 발해가 어떤 반응을 보였는지에 대한 기록은 남아 있질 않다.

 

삼국사기에 신라는 발해 초기를 북적(北狄), 즉 북쪽 오랑캐로 인식했다. 하지만 교전 시기였던 성덕왕을 지나면서 북국(北國)으로 표현한다. 대등한 나라로 인식한 것이다.

신라에서 발해에 사신을 보냈다는 기록이 삼국사기에 두차례 나온다. 원성왕 6(790)일길찬 백어(伯魚)를 북국(발해국)에 사신으로 보냈다고 했고, 이어 헌덕왕 4(812)급찬 숭정(崇正)을 북국(발해국)에 사신으로 보냈다고 했다.

발해가 당으로부터 정식 책봉을 받고 당-발해 사이에 교류가 잦아지면서 신라도 발해를 무시할수 없었던 것이다. 발해 사신의 관등이 일길찬인데 이는 일본에 보낸 사신의 관등보다 높다. 사신의 관등으로 보면 신라에서 발해의 위상이 일본보다 높았다고 할수 있다.

신라가 한때 전쟁을 치르던 발해에 사신을 보낸 것은 원성왕 이후 국내 정정이 불안해 지면서 국경을 안정화시키려는 목적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삼국사기에서도 그동안 신라인들이 쓰던 북적이란 표현이 북국으로 대체된다.

 

신라도(천정군에서 책성부까지 39개역) /강성산 논문 캡쳐
신라도(천정군에서 책성부까지 39개역) /강성산 논문 캡쳐

 

신라와 발해 사이에 교역로가 있었던 것으로 확인된다. 연구자들은 삼국사기 지리지 마지막 대목에 주목한다.

가탐(賈耽)의 고금군국지(古今郡國志)에는 발해국의 남해(南海), 압록(鴨淥), 부여(扶餘), 책성(柵城) 4개 부()는 모두 고구려의 옛 땅이었으며 신라의 천정군(泉井郡)으로부터 책성부에 이르기까지 모두 39개의 역()이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다”(賈耽古今郡國志云 渤海國南海鴨淥扶餘柵城四府 並是高句麗舊地也 自新羅泉井郡至柵城府 凡三十九驛)

가탐(730~805)은 당나라 관료로 지리학자로 유명하다. 김부식이 가탐의 지리서 고금군국지를 인용해 신라에서 발해를 연결하는 길이 있었다고 언급했다. 신라의 북쪽 경계인 천정군은 함경남도 덕원으로, 지금의 원산에 해당하고, 책성은 중국 훈춘(琿春)으로 발해에서는 동경용원부로 5경의 하나였다. 신라 국경에서 발해 중심부까지 39개 역이 있어 사람이 왕래하고 물자가 오갔다는 것이다. 후대의 학자들은 이 길을 신라도(新羅道)라고 명명했다.

이 길을 통해 신라의 사신이 발해로 갔을 것으로 추정된다. 발해 사신이 이 길을 이용해 일본으로 갔다. 속일본기(續日本紀)에 따르면, 7771월에 발해 사신이 남해부의 토호포(吐號蒲)를 출발해 일본으로 향했다고 한다.

 

한조채의 사행로 /강성산 논문 캡쳐
한조채의 사행로 /강성산 논문 캡쳐

 

속일본기에는 당의 사신 한조채(韓朝彩)가 신라도를 이용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가탐도 한조채의 경험을 기록에 남긴 곳으로 보인다.

도쿄대 아카바메 마사요시(赤羽目 匡由)의 연구에 따르면, 당나라 칙사 한조채는 762764년 사이에 당~발해~신라~당의 루트를 거쳐 사행(使行)을 수행했다. 한조채는 변경·외국정보 수집의 전문가였다고 추측된다. 가탐의 지리서 가운데 삼국사기에 인용된 부분과 신당서 지리지에 한조채의 동아시아 사행시 견문 내용이 담겼다는 것이다.

연변대 강성산은 속일본기, 가탐의 지리서 등을 토대로 한조채의 사행로를 복원했다.

 

신라와 당의 교역로 또는 사행로는 있었지만 왕래는 원활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다만 신라와 발해는 당이나 일본에서 자주 마주할 기회가 있었다. 사료를 통해 신라와 발해의 사신이 당에서 마주친 경우는 최소 20여 차례나 된 것으로 조사되었다. 일본에서도 신라 사신과 발해 사신이 만난 정황이 기록에 남아 있다.

두 나라의 직접적인 교류는 미약했지만, 신라와 발해 사이의 길은 발해가 거란에 멸망했을 때 발해인들이 고려로 넘어가는 길이 되었을 것이다.

 


<참고한 자료>

8세기 신라의 대발해 인식 변화와 그 배경, 김진한, 2023, 경북대

8세기 중엽에 있어서 신라와 발해의 통교관계, 아카바메 마사요시, 2008, 고구려발해학회

8세기 60년대 초반 당ㆍ발해ㆍ신라를 잇는 교통로에 대한 고찰, 강성산, 2018, 고구려발해연구

당 장안성에서의 외교의례와 외국 사신간의 외교적 갈등, 김종복, 2014, 한국역사연구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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