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해⑤…무왕의 등주공격
발해⑤…무왕의 등주공격
  • 김현민 기자
  • 승인 2023.08.02 12: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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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수말갈의 배신, 동생 문예의 망명, 세자의 급서 등…중국 해양기지 기습공격

 

나라가 망하는 것도 일순간이요, 새로운 나라가 서는 것도 순식간이다. 대조영이란 영웅이 당군을 격퇴하고 동모산에 나라를 세웠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고구려 후예와 말갈 부족들이 그에게 달려가 신하가 되길 자청했다.

북방에는 돌궐과 거란에 세력을 키워 나갔다. 당은 돌궐과의 대결을 위해 대조영의 존재를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건국한지 7년째 되는 705년 당 중종은 사신을 진국에 보냈지만 돌궐과 거란에 막혀 실패했다. 그러자 대조영이 아들 대문예(大門藝)를 당에 보내 입시케 했다. 7132월 현종은 사신을 보내 대조영을 발해군왕(渤海郡王)으로 책봉했다. 이후 대조영의 나라는 발해로 불리게 되었다. 당이 국왕 대신에 군왕(郡王)이란 타이틀을 준 것은 국가로 인정하지 않겠다는 것이다. 당은 끊임없이 말갈족에 대해 이간계를 벌였다.

대조영 당시에 발해는 영역을 확장해 영주의 동쪽 2,000리에 있는데, 남으로 신라와 서로 접하였고, 월희말갈(越憙靺鞨)에서 동북으로 흑수말갈에 이르기까지 사방이 2,000리나 되었으며, 가구수(編戶)10여만, 병력(勝兵)은 수만인이라고 할 정도로 성장하게 되었다. (五代會要 30, 渤海傳)

발해의 급속한 팽창은 만주북부 흑룡강성에 위치한 흑수말갈의 견제를 받게 되었다. 719년 대조영이 죽고 그의 아들 대무예(大武藝)가 즉위했으니, 발해 2대 무왕이다. 신당서에 대무예가 즉위하여 영토를 크게 넓히니 동북의 모든 오랑캐들이 두려워하여 그를 섬겼다고 했다. 여기서 오랑캐는 말갈족으로 일컫는 것으로 보이는데, 다수의 말갈 부족이 발해에 복속하자 경쟁부족이었던 흑수말갈이 긴장했다.

대무예가 즉위할 무렵, 중국 동북지역이 혼란스런 정세에 휩싸였다. 720년 돌궐과 거란, 해가 당과 전쟁을 벌여 당이 패하는 상황이 발어졌다. 당은 그해 9월 발해에 사신을 파견해 군사적 지원을 요청했는데 발해는 당의 요청을 거절하고 전쟁에 개입하지 않았다.

 

고대 해로 /그래픽=박차영
고대 해로 /그래픽=박차영

 

그런데 발해의 북방에 있던 흑수말갈이 당과 손을 잡았다. 흑수말갈과 당이 연합하면 발해는 포위되는 형국이다. 무왕이 죽위한지 3년째 되는 722, 흑수말갈의 추장 예속리계(倪屬利稽)가 당에 입조하니, 현종이 크게 기뻐하며, 그를 발리주자사(勃利州刺史)에 제수했다. 이어 요동반도의 군 지휘관 안동도호 설태(薛泰)가 흑수말갈에 흑수군(黑水軍)을 설치할 것을 건의했고, 726년 당 조정은 흑수말갈을 흑수부로 하고, 그 수령을 도독으로 삼고 장사(長史)를 두어 부락을 감독하도록 했다. 728년 당은 흑수부 도독에게 이()씨 성과 헌성(獻誠)이라는 이름을 내리고 운휘장군 흑수경략사로 삼아 유주도독에 예속시켰다.

무왕은 위협을 느꼈다. 무왕은 부하들에게 흑수가 우리 국경을 거쳐 처음으로 당과 서로 통했다. 지난날 돌궐에게 토둔(吐屯, 돌궐의 벼슬)을 청할 때도 모두 우리에게 먼저 알리고 함께 갔다. 이제는 뜻밖에 바로 당에게 벼슬을 청했으니, 이는 필시 당과 통모(通謀)하여 우리를 치려는 것이다.”고 말했다. (구당서)

무왕은 동생 문예와 그의 장인 임아(任雅)에게 명해 군대를 이끌고 가서 흑수를 치게 했다. 문예는 일찍이 볼모로 당나라 수도에 다녀온 적이 있어 당나라 군사력의 우세함을 알고 있었다. 동생은 유화론을 펼쳤다.

흑수가 당에게 벼슬을 청했다고 해서 그를 곧바로 치고자 한다면 이것은 당을 배반하는 것입니다. 당은 사람의 많음과 군사의 강함이 우리의 만 배나 되는데, 하루아침에 원수가 된다면 스스로 멸망을 부를 뿐입니다. 지난날 고구려가 전성기에 강한 군사 30만으로 당과 싸워서 복종하지 않다가 당의 군사가 한번 덮치니 땅을 쓸어버린 듯이 다 멸망했습니다. 오늘날 발해의 인구가 고구려의 몇 분의 일도 되지 않는데 당을 거역하려 하니, 이 일은 결단코 옳지 못합니다.” (구당서)

무왕은 듣지 않았다. 문예가 또다시 글을 올려 간하자 무왕은 화를 내며 문예를 경질하고 종형 대일하(大壹夏)를 보내 군사를 통솔하도록 했다. 왕은 문예는 불러다가 죽이려 했다. 문예가 당나라로 도망가니, 당 현종은 그에게 좌효위장군을 제수했다. 주전론과 주화론이 권력투쟁으로 비화되었고, 결국 칼자루를 쥔 형이 동생을 밀어냈다.

 

등주 위치 /위키피디아
등주 위치 /위키피디아

 

무왕은 동생을 그냥 놓아 두지 않았다. 왕은 73110월 대성취진(大姓取珍) 120명의 대규모 사절단을 당에 보내 대문예를 처단해 달라고 요청했다. 당 현종은 거짓말을 했다. 황제는 문예를 서쪽 지방(安西)에 보내 놓고는 문예가 먼 곳에서 귀순해 왔으므로 의리상 죽일수 없었소. 이제 영남(嶺南)으로 유배보냈는데 벌써 길을 떠났소라고 회신을 보냈다. 그런데 당 조정의 누군가가 비밀을 누설해 무왕이 알게 되었다. 무왕은 대국은 신의를 보여야 하거늘 어찌 거짓을 일삼는단 말입니까? 이제 들으니, 문예가 영남으로 떠나지 않았다 합니다. 앞서 청한 대로 죽여주시기 바랍니다.”고 했다.

당 현종은 하는수 없이 문예를 영남으로 보내고, 이번에는 무왕에게 겁을 주었다. 그해 말 현종은 칙발해왕대무예서(勅渤海王大武藝書)라는 칙서를 작성해 발해 임금에게 전달했다. 칙서에는 현종은 발해국왕 대무예의 행실에 흠이 가는 것을 막기 위해 대문예를 보호했다고 했다. 이어 발해가 지리적으로 멀리 떨어져 있음을 믿고 대문예의 처벌을 요구하는 것은 당을 배반하는 행위이며, 이에 대해 당이 조치를 취할 것임을 시사했다. 무왕이 자신의 처분을 따르지 않을 경우 군사적 응징을 할수 있음을 황제가 노골적으로 경고한 것이다.

무왕이 두려워 한 것은 당에 의한 정권교체(regime change) 가능성이었다. 당나라에 숙위 중이던 맏아들 대도리행(大都利行)7284월에 사망했다. 둘째 아들 대흠무(大欽茂)와 대문예가 동등한 왕위계승 순위에 있었다. 당이 군사를 동원해 무왕을 쫓아낸다면, 다음 계승자는 친당파였던 문예일 가능성은 불을 보듯 명확했다.

 

등주 수성 /바이두 백과
등주 수성 /바이두 백과

 

무왕에게 당과의 일대 전쟁이 불가피했다. 무왕은 선제공격을 통해 당의 허를 찌르는 전략을 선택했다. 7329월 발해 수군은 산동반도에 위치한 당의 덩저우(登州)를 선제공격했다.

등주는 산둥(山東)성 옌타이(烟台)시에 펑라이(蓬莱). 이 곳은 예로부터 중국의 해양진출 기지였고, 지금도 물에 세워진 수성(水城)이 잘 보존되어 있다. 중국의 입장에서 지정학적으로 중요한 곳이다. 서해와 발해(渤海, 보하이)를 가르는 곳에 위치하며, 산둥반도와 랴오둥반도를 잇는 먀오다오(廟島)열도가 출발하는 곳으로 한반도와 만주, 일본으로 가는 항로의 기점이다. 진시황이 불로초를 구하기 위해 소년, 소녀들을 동방으로 보낸 곳이 이곳이었다.

발해의 공격은 선제공격이자, 기습공격이었다. 이 공격으로 등주자사(登州刺史) 위준(韋俊)이 전사했다. 최근 발견된 위준의 묘비에는 이렇게 쓰여 있다. “무도한 발해(島夷)가 멀리 떨어진 곳에 있다가 숨어서 큰 바다를 건너 바로 고립된 성()을 목표로 삼았다. 갑자기 관사(官舍)에서 죽으니, 나이가 57세였다.”

무왕은 등주 공격에 장문휴(張文休)를 대장으로 삼아 수군을 동원했다. 등주는 수·당이 고구려를 해상으로 공격할 때 전함과 보급선이 집결했던 해군기지였다. 장문휴가 이끄는 발해군은 상륙후 등주자사를 전사시키고 현지 주둔군을 거의 섬멸했다. 동국대 문윤수는 그의 논문에서 당시 등주의 당군이 대략 3,853명 정도이고, 공격에 나선 발해군도 그와 비슷한 4,000명 이내로 추정했다.

당 현종은 위준의 전사 소식을 듣고 우령군장군 갈복순(葛福順)에게 반격을 명했다. 하지만 갈복순의 전투기록은 남아 있지 않다. 당군이 등주 현장에 도착했을 무렵 발해군은 철수해버린 듯하다. 발해군은 소기의 목적을 달성한 후 전선을 타고 귀환한 것으로 보인다. 전형적인 게릴라 전술이었다.

 


<참고한 자료>

732~733년 발해(渤海)와 당() 전쟁의 전개 과정과 군사력, 문윤수, 동국대, 2023

732渤海戰爭 과정 재검토, 임상선, 동북아역사재단, 2020

발해 무왕의 정치적 과제와 등주 공격, 심승구, 국민대, 1995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등주공격 (登州攻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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