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해⑬…수령의 어원
발해⑬…수령의 어원
  • 김현민 기자
  • 승인 2023.08.29 12: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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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경 15부 62주 설치…지방을 복속시키되, 우두머리에게 자율권 부여

 

발해는 고구려보다 넓은 영토를 지배했다. 송기호 교수의 추산에 따르면 발해의 면적은 최소 50, 최대 63에 이른다. 남북한을 합친 한반도의 2.2~2.8배에 해당한다.

이 넓은 땅을 지배하기 위해 발해는 당시 중국의 선진제도를 모방했다. 발해도 당나라처럼 5()을 두었고, -(府州)제도를 채택했다. 발해는 독특하게 지방에 수령(首領)제도를 시행했는데, 복속부족의 자치를 인정하는 제도였다.

신당서에 발해는 51562주를 두고 있다”(地有五京十五府六十二州)고 했다.

5경은 상경(上京龍泉府), 중경(中京顯德府), 동경(東京龍原府), 남경(南京南海府), 서경(西京鴨綠府), 발해의 왕족과 지배적 귀족들의 통치거점이었다. 그에 비해 15, 62주는 피지배 또는 복속된 영토로, 중앙의 통제를 받는 지역이었다.

5경은 2대 무왕 시기부터 중요시되었으며, --현보다 상급으로 실질적인 지방통치기관이었다. 이중 중경, 동경, 상경은 도읍지였다. 또 수도가 아니었던 남경남해부는 신라, 서경압록부는 당나라와 교역의 거점이었던 것으로 파악된다.

 

발해의 용머리상(헤이룽장성 닝안시 상경성 궁전터) 복제품 /박차영
발해의 용머리상(헤이룽장성 닝안시 상경성 궁전터) 복제품 /박차영

 

발해는 말갈 7부족을 통합하면서 성장했다. 말갈 7부족은 고구려가 말갈족을 일곱 개 지역으로 구분하면서 인식한 것이었는데, 단계적으로 발해의 테두리에 편입되었다. 698년 대조영이 자신이 속한 속말말갈을 토대로 발해를 건국했고, 그후 철리(鐵利), 불열(拂涅), 월희(越喜), 흑수(黑水), 누루(虞婁) 말갈이 단계적으로 복속했다. 발해는 740년 무렵에 철리의 옛 땅에는 철리부(鐵利府), 불열의 옛 땅에는 동평부(東平府), 월희의 옛 땅에는 회원부(懷遠府), 우루말갈의 읍루 옛땅에는 안변부(安邊府)와 정리부(定理府)를 설치했다.

이때부터 말갈 각부족이 별도로 당나라에 조공했다는 기사들이 보이지 않는다. 발해가 흑수를 비롯해 말갈 부족의 조공을 통제하며 발해를 통합해 나갔음을 알수 있다. 조공은 외교권으로 국가로서의 독립성을 의미했다. 740년과 741년 이후에는 철리·불열·월희의 조공이, 752년 이후에는 흑수의 대당 조공이 완전히 차단되었다. 발해의 지방제도 개편과 말갈부족의 복속이 일단락된 것으로 해석된다.

 

발해는 지방을 간접통치하는 방식을 시행했다. 복속을 시키되 자율권을 주는 형식이다. 1562주의 지방제도는 종족의 거주지를 단위로 편성되었다. 부와 주의 수장은 도독(都督)과 자사(刺史)였다. 15부는 아래 62주를 통할했다. 부 아래에는 현이 있었는데, 현의 우두머리는 현승(縣丞)리고 했다.

발해는 지방의 우두머리에게 수령(首領)이란 호칭을 부여했다. 수령이란 표현은 중국왕조가 발해나 말갈·거란 등 북방 주변 종족의 추장에 붙여주던 호칭이었는데, 발해가 도입해 말갈족은 물론 기미부족의 우두머리에게 사용했다. 성균관대 강성봉은 이 풍습이 고려가 발해 유민을 대거 영입, 민족융합정책을 추진하면서 변경에 거주하는 여진족에게 도령(都領)이란 칭호를 준 것으로 유추했다.  북한에서 최고지도자를 일컬어 수령이라고 하는데, 그 어원은 발해로 거슬러 올라간다.

 

 

이미지=Alchetron
이미지=Alchetron

 


<참고한 자료>

발해 도성과 지방통치, 김동우, 2017, 고구려발해연구

말갈 7부의 실체와 발해와의 관계, 권은주, 2009, 고구려발해연구

발해 수령과 고려 도령의 상관성 검토, 강성봉, 2012, 고구려발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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