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해⑯…어느날 갑자기 멸망
발해⑯…어느날 갑자기 멸망
  • 김현민 기자
  • 승인 2023.09.11 13: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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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정세 변화에 대응 못하다가 급성장한 거란 공격에 20여일만에 항복

 

서기 9251216, 거란왕 야율아보기는 발해를 치겠다고 선언했다. 이어 1221일 군사를 움직였고, 1229일 발해 최전방 요충 부여성을 포위했다. 부여성은 3일만에 함락되었다. 해를 넘겨 92619일에 거란군은 발해의 수도 상경성을 포위했다. 부여성에서 출발해 6일만에 무려 400km이상을 달려 발해 수도에 다다른 것이다. 수도가 포위한지 3일 후인 926112, 발해왕 대인선(大諲譔)이 거란 황제에게 항복했다. 698년 건국한 발해는 햇수로 228년만에 허망하게 멸망했다.

 

한때 해동성국이라 불렸던, 고구려보다 넓은 땅을 차지했던 발해가 한달도 되지 않은 짧은 시기에 멸망한데 대해 역사학자들은 수수께끼라고 표현했다. 백두산폭발설, 내분설이 나온 것도 이런 배경에서다. 백두산은 발해가 멸망한지 20년 후인 946년에 폭발한 것으로 과학자들에 의해 입증되었으므로, 백두산폭발 원인설은 무산되었다. 그러면 내분설인가. 멸망 직전에 발해의 고위 관료 상당수가 고려로 망명한 사실이 내분설을 뒷받침한다.

하지만 한 나라가 일어서고 멸망하는 것은 순식간이다. 동서고금의 수많은 나라가 명멸한 것을 보면 이해가 된다. 내부에 그 원인이 있을수도 있고, 외부의 적이 급팽창할수도 있다. 발해의 멸망은 내인설보다 외인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당나라가 907년 멸망하고 당-발해의 동맹관계가 무너졌다. 그 틈에 거란이 급팽창했다. 동북아시아에 힘의 불균형이 생기고 발해가 대처하지 못한 것이다. 바야흐로 천하동란의 시대였다.

 

발해와 거란 /위키피디아
발해와 거란 /위키피디아

 

발해의 건국과 멸망에는 거란이 직간접으로 관련되었다. 고구려 멸망후 베이징 근처 영주(營州)에서 거란의 이진충(李盡忠)이 당에 반란을 일으키자 대조영 집단도 그 틈에 무리를 모아 동쪽으로 도주해 발해를 건국했다. 초기 거란과 발해는 우호적 관계였다. 무왕 이후 발해가 당과 우호관계를 맺자 거란과의 관계가 소원해 졌다. 당이 건재할 땐 동양의 평화가 유지되었다. 하지만 황소의 난(875~884) 이후 당이 쇠약해지면서 북방의 여러 민족들이 일어나고 거란에서는 901년에 야율아보기(耶律阿保機)가 질라부의 부족장으로 선출되면서 만주의 안정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야율아보기는 시대의 영웅이었다. 거란의 여러 부족을 흡수하고 주변의 실위(室韋), (), 여진(女眞), 토욕혼(吐谷渾)을 정벌했다. 당이 멸망한 후 중국은 오대십국의 대혼란에 빠졌다. 구오대사(舊五代史) 거란전에 이렇게 쓰여 있다. “중원이 혼란에 빠지고 북방 변경에 방비가 없는 것을 틈타서 (당의) 여러 을 잠식했고, 타타르(韃靼)와 해, 실위 등의 무리를 모두 강제로 동원해 때때로 중국을 침입해 왔다.”

야율아보기는 한족을 포로로 잡아 왔다. 이 때 한족 지식인 한연휘(韓延徽), 한지고(韓知古) 등이 포로로 잡혀와 야율아보기의 세력 확장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907년에 야율아보기는 거란 연맹의 군사 대권을 장악하고, 요련(遙輦)씨를 연맹장에서 쫓아냈다. 부족들은 야율아보기를 새로운 연맹장으로 선출하였다. 야율아보기는 난하(灤河) 일대에 농업을 장려하고, 군사 제도를 제정하고 중원의 한족 문화를 받아들이면서 남아 있는 부락 연맹장을 제거하고 거란 각부를 통일했다.

916년에 연맹장을 세 번이나 연임한 뒤, 야율아보기는 부족 연맹의 선거제도를 폐지하고 왕조 체제를 도입해 대거란국(大契丹國)을 세웠다. 스스로 천황왕(天皇王)이라고 불렀고, 연호를 신책(神册)이라고 했다. 그가 요() 태조이다.

야율아보기 /위키피디아
야율아보기 /위키피디아

 

거란과 발해의 충돌은 멸망 3년전부터 시작되었다. 진만(陳萬)이라는 요나라 사람의 묘지명에 그 내용이 소개되었다. 권은주에 따르면, 진만은 한족으로 거란에 투항해 군사활동을 했다. 그의 묘지명에 923년에 황제 야율아보기가 발해를 공격했고, 925년에 또다시 발해의 신주와 환주를 공격했다는 내용이 나온다. 이 두 번의 공격 사이인 924년에 거란이 중국인을 요주로 이주시키자 발해가 그곳을 공격했다는 기록이 사서에 적혀 있다. 이를 종합하면, 발해가 멸망하기 3년전부터 거란의 공격과 발해의 역공이 전개되고 있었던 것이다.

 

발해 멸망에 관한 기록은 요사(遼史)에 비교적 상세하게 나와 있다.

92512, 야율아보기는 일종의 전쟁 준비 의식을 치렀다. 요 태조는 거란의 성지인 목엽산(木葉山)에서 산제(山祭)를 올리고, 오산(烏山)에서 청우(靑牛백마(白馬)를 잡아 하늘과 땅에 제사를 올렸다. 이후 철갈산(撤葛山)에 가서 사귀전(射鬼箭)을 행했다. 사귀전이란 죄인을 기둥에 묶어 놓고, 활을 난사해서 죽이는 것이다. 출정이나 귀환할 때에 일종의 불길한 것을 제거하는 의식이었다. 주로 죄수와 포로 등을 묶고 쏘았다.

야율아보기는 발해 공격 이유를 이렇게 말했다. “두 가지 일(兩事) 가운데 한 가지 일은 이미 완수하였으나, 발해에 대한 대대로 내려온 원수’(世讎)만은 씻지 못하였으니, 어떻게 편안히 있을 수 있겠는가.” 서방 정벌이 끝났으니, 두가지 목표 가운데 남은 동방(발해) 정벌에 나서겠다는 것이다.

1221일 야율아보기는 발해 원정에 나섰다. 발해의 변경거점이었던 부여부(扶餘府)3일밖에 버티지 못했다. 하루도 쉬지 않고 수도 상경성(上京城)으로 향하다가 도중에 발해의 노상(老相)이 이끄는 3만 대군을 격파하고 단숨에 홀한성(忽汗城, 상경)을 포위했다. 거란은 황태자 야율배, 황자대원수 요골(堯骨), 남북재상 야율소(耶律蘇)가 총동원되어 공격했지만 발해는 전쟁에 대한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수도가 포위된지 3일 만에 발해의 마지막 왕 대인선(재위 906~926)은 항복했다. 너무나 쉽게 무너지자 대인선은 틈을 타 반란을 일으켰지만 소득이 없었다.

발해인은 예로부터 세 사람이 모이면 호랑이도 당해 낸다고 할 정도로 용맹함으로 이름을 날렸다. 하지만 나라가 망할 때엔 조금도 용감하게 싸우질 않았다. 해동성국이라던 말도 허망한 과찬에 불과했다. 그들은 국제정세의 격변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했고, 좋은 시절이 언제까지나 유지할 것으로 안이하게 생각했다가 어느날 갑자기 호랑이가 되어버린 거란에 물려간 것이다.

 

세자를 자칭한 대광현(大光顯)은 멸망 직전에 고려로 들어갔다. 대광현은 관료와 군사, 백성 수 만호를 이끌고 고려로 갔고, 왕건은 대광현에게 왕계(王繼)라는 성명을 내리고 고려 왕실에 적을 두게 하였으며, 원보(元甫)의 벼슬을 주고 배주(白州)를 다스리게 했다. 이에 대광현은 조상의 제사를 지낼 수 있었다.

거란은 발해를 멸한후 그곳에 동단국(東丹國)이라는 괴뢰국가를 세웠다. 발해를 멸망시킨 야율아보기는 첫째 아들 배()를 동단국 국왕에 임명하고 돌아가던 중에 부여부에서 병사했다. 동단국은 상경용천부였던 홀한성(忽汗城)을 수도로 삼았으나, 이름을 천복성(天福城)으로 바꿔 불렀다가 오래지 않아 요양(遼陽)으로 옮겼다.

발해 유민은 거란에 흡수되거나 현지에서 여진인으로 살아가거나 중원으로 들어가기도 했다. 일부는 고려로 건너갔고, 거란에 대항해 발해 부흥 운동을 일으키기도 했다.

 


<참고한 자료>

발해국과 거란() 관계사의 연구쟁점과 향후 과제, 임상선, 동북아역사재단, 2017

요동 혈전과 발해 멸망의 비밀(해동성국, 고구려를 품은 발해), 권은주, 2019

발해의 멸망과정과 원인, 김기섭, 2008, 한국고대사학회

우리역사넷, 해동성국이 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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