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해⑥…마도산전투
발해⑥…마도산전투
  • 김현민 기자
  • 승인 2023.08.03 13: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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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해-돌궐-거란 동맹군의 공격…당-신라-흑수말갈-실위의 연합방어

 

7329월 건국한지 30여년밖에 되지 않는 발해가 동양의 패권국 당나라를 공격한다는 것은 감히 놀라운 일이었다. 무왕의 동생 문예가 걱정했다시피 고구려가 당나라와 정면대결하다 망했는데, 고구려 병력의 몇분의1도 되지 않는 신생국이 당을 거역한 것이다. 거기에는 국제공조라는 큰 그림이 있었다.

7329월초 거란이 발해에 사신을 보내 함께 당을 공격할 것을 제의했고, 발해의 무왕이 이를 약속했다. 앞서 당이 지금의 베이징 근처인 유주(幽州)에 절도사를 설치함으로써 거란-발해와의 거리를 바짝 좁혔다. 거란은 돌궐과 동맹을 맺고 있었기 때문에 돌궐-거란-발해의 동맹관계가 형성되었다. 발해는 당 공격에 앞서 일본과도 외교관계를 수립해 신라가 배후를 압박할 것에 대비했다.

대개의 전쟁은 국제전으로 비화한다. 이해관계가 비슷한 나라끼리 연합해 두 세력이 충돌한다. 발해와의 대결에서 당은 실위, , 흑수말갈을 끌어안고, 신라와 제휴했다.

발해가 당의 수군요충지 등주(登住)를 공격한 것은 허를 찌르는 전략이었다. 내륙국가에서 출발한 발해가 어떻게 30년 동안 중국 수군 심장부를 공격할 정도로 해상력을 확보했을까. 일본군이 진주만을 기습공격한 것 이상의 대담한 작전이었다.

발해가 당을 육로로 공격하기 어려웠다. 육로를 이용하려면 요서(遼西)를 관통해야 하는데 그곳엔 거란, 해와 같은 이민족 거주지가 있었고, 남의 땅을 지나야 하는 번거로움이 있었다. 그에 비해 해상로는 뚤려 있었다. 압록강 하구 박작성(泊汋城)은 고구려 시절의 전초기지였고, 발해가 일찍이 확보한 영토였다. 국민대 심승구는 발해 수군이 박작성에서 출항했을 것으로 추정했다. 발해는 고구려의 수군력을 계승했을 가능성이 크다. 고구려는 수·당 전쟁에서 막강한 수군을 보여주었다.

발해군은 등주에서 자사 위준(韋俊)을 살해하고 현지 주둔 당군을 초토화하고 사라졌다. 당 현종은 발해의 기습공격에 노발대발하고 대응군을 파견했으나, 그땐 발해군이 퇴각한 후였다. 등주를 기습공격한 발해군은 어디로 갔을까. 귀국했을까, 아니면 다른 곳을 공격햤을까.

힌트는 허맹용(許孟容)이 지은 오승흡신도비(烏承洽神道碑)에서 구할수 있다. 비문에 따르면 발해왕이 해안(海濱)을 떠나 마도산(馬都山)에 이르러 성읍(城邑)을 함락하고 사람들을 죽였다고 했다. 또 신당서 열전 오승자(烏承玼)조에 무예(武藝, 무왕)가 자객을 보내 동도(東都, 낙양)에서 문예를 찌르고, 병사를 이끌고 마도산에 이르러 성읍의 사람을 죽였다고 했다.

오승흡신도비와 당서를 종합하면 등주 공격 이후 발해군이 마도산에 집결한 것은 분명하다. 한 부류는 등주를 공격한 군대고, 다른 한 부류는 무왕의 동생 문예를 살해하려던 자객 일행이다. 마도산은 현재 허베이성(河北省) 칭룽(靑龍) 북서부의 도산(都山)에 해당하는 곳으로, 유주 인근이다. 당나라 국경선 근처에 발해군이 접근한 것이다.

마도산 군영은 무예, 즉 발해 무왕이 직접 이끌었다. 무왕은 자객을 보내 동생을 살해하려 했으나 시류패하고 직접 군대를 이끌고 당을 공격하려 한 것이다. 이에 당 현종은 가까스로 목숨을 건진 대문예를 파견해 유주에 군사를 징발해 발해군을 토벌하도록 했다. 전쟁은 참혹하다. 형제는 서로 마주쳐 전투를 벌였을 가능성이 크다.

신당서를 보면, “오승자가 요로(要路)를 막고 큰 돌로 구덩이를 만든 것이 400리에 이르니, 적들이 들어오지 못했다. 이에 떠나갔던 백성(流民])이 돌아왔고, 군사들이 조금씩 쉬면서 갑옷을 벗고 밭을 갈게 되었다고 했다. 당군은 좁은 길에 함정을 파서 발해군을 방어하는데 비교적 성공한 것 같다.

이때 거란군이 나타났다. 그 장수는 가돌우(可突于)였다. 발해-돌궐-거란의 동맹이 작동한 것이다. 신당서를 인용해 보자.

다음 해(733), 가돌우가 또다시 와서 약탈했다. 유주장사(幽州長史) 설초옥(薛礎玉)이 부장(副將) 곽영걸(郭英傑), 오극근(烏克勤), 오지의(烏知義), 나수충(羅守忠)을 보내어 정예기병(精騎) 1만을 거느리고 항복한 해()의 무리와 함께 지휘하여 추격하게 했다. 군사가 유관도산(楡關都山)의 아래에 이르자, 가돌우는 돌궐병들을 지휘하여 관군(官軍)과 싸웠다. 마침내 해의 무리가 두 마음을 품고 흩어져서 달아나 요험에 의지했다. 관군이 대패하자, 지의와 수충은 휘하 군사들을 거느리고 도망쳐 왔으나, 영걸과 극근은 진()에서 죽었고, 그 휘하의 6,000여 명은 전부 적들에게 죽임을 당했다.“

거란군이 참전함으로써 당군 1만명 가운데 6,000명이 몰살하는 패전을 겪은 것이다. 장수들 가운데 둘은 전사하고 둘은 패주했다. 대참패였다.

 

732~733년 발해의 대당공격로 /심승구 논문 캡쳐
732~733년 발해의 대당공격로 /심승구 논문 캡쳐

 

마도산 전투는 등주공격 이듬해인 733년 윤3월에 있었다. 등주 공격은 발해의 단독 공격이었는데 비해, 마도산 전투는 국제전이었다. 당군은 마도산에 흑수말갈(黑水靺鞨)과 실위(室韋)5,000명의 번병(藩兵)을 구성해 참전시켰다. ()족을 끌어들였으나, 해족은 당에 배반하고 거란군에 붙었다.

당의 연합군은 총 10만명이라고 했다. 신당서에 범양과 신라병 10만을 내어 그를 토벌하게 했으나, 공이 없었다“(范陽新羅兵十萬討之無功)고 했다. 동국대 문윤수는 10명 가운데 신라군이 3만명, 범양의 당군은 7만명으로 보았다.

그러면 신라군은 발해의 어디를 공격했을까. 발해와 신라의 국경, 즉 패강(浿江) 일대였다. 지금의 대동강이다.

당은 발해를 공격하기 위해 신라에 지원군을 요청했다. 자치통감에 개원 21(733) 봄 정월에 명을 내려 태복경원외경 김사란을 신라에 보내어 군사를 일으켜 발해 남쪽 변방(南鄙)을 공격하게 했다. 때마침 대설이 내려 한길 남짓하게 쌓였고 산세는 좁고 험하니, 군사가 절반이 넘게 죽어 공이 없이 돌아왔다.“고 했다. 삼국사기에도 성덕왕 32(733) 가을 7, 당 현종은 태복원외경 김사란을 귀국시켜 왕에게 벼슬을 더해주어 개부의동삼사(開府儀同三司) 영해군사(寧海軍使)로 삼고, 신라는 군사를 일으켜 말갈의 남쪽 변방을 공격하게 했다. 때마침 대설이 내려 한길 남짓하게 쌓이고 산세는 좁고 험하니, 군사가 절반이 넘게 죽어 공 없이 돌아왔다.“고 기록되어 있다.

김사란(金思蘭)은 신라 왕족으로 당나라에 머물러 숙위(宿衛)하다가 당의 청병사 사신의 임무를 받아 귀국한 것이다. 이때 발해를 공격한 장수는 김유신의 손자 김윤중과 김윤문이었다.

신라군은 발해의 남부지역을 공격했지만 실패했다. 핑계는 대설과 추위였다. 여기서 신라가 병력을 지원한 주목적이 당나라로부터 영토확보였다는 점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삼국사기에 성덕왕 34(735) 의충이 돌아올 때 황제는 조칙을 내려 신라에 패강(浿江, 대동강) 이남의 땅을 주었다.“고 했다. 백제와 고구려가 멸망한 후 70년이 지나도록 당나라와 신라의 국경이 확정되지 않고 있었다. 당은 옛고구려지역을 자국영토라고 주장했고, 신라는 김춘추-당태종의 약속대로 대동강 이남을 영토로 간주하고 있었다. 이 모호함을 해소하기 위해 신라가 당의 요청을 따라 군대를 지원한 것이다. 그렇게 본다면 신라군이 목숨을 던져가며 적극적으로 참전하지는 않았을 가능성이 있다.

 

당과 발해의 전쟁은 어느 일방의 승리도 패배도 아닌 상태로 끝났다. 다만 이 전투 이후 당은 돌궐과 연합하고 있는한 발해를 꺾을수 없다는 인식을 갖게 되었고, 발해도 당과의 무모한 전쟁을 오래끌수 없는 입장이었다. 이때 중국 서남쪽에서 토번(吐蕃)이 세력을 확대해 당이 고전을 겪게 되었다. 당은 동북의 안정이 절실하게 필요하게 되었다.

발해가 먼저 고개를 숙이고 들어갔다. 당 황제는 크게 꾸짓고 용서해 주었다. 당시 동양의 질서는 그렇게 움직였다. 마도산 전투 2년후인 735~736년 무렵의 일이다. 당과 발해의 교류가 재개되었다. 하지만 발해와 신라 사이에 갈등의 골은 깊어만 갔고, 두 나라는 발해가 멸망할 때까지 화해하지 않았다.

 


<참고한 자료>

732~733년 발해(渤海)와 당() 전쟁의 전개 과정과 군사력, 문윤수, 동국대, 2023

732渤海戰爭 과정 재검토, 임상선, 동북아역사재단, 2020

발해 무왕의 정치적 과제와 등주 공격, 심승구, 국민대, 19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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