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해⑧…두 공주의 환생
발해⑧…두 공주의 환생
  • 김현민 기자
  • 승인 2023.08.09 12: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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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왕의 둘째 정혜공주, 넷째 정효공주의 무덤 발견…출토물에서 당대 모습 확인

 

발해 3대 문왕은 무려 57년간(737~793) 재위하며 나라를 안정시킨 군주였다. 1980년에 발견된 넷째딸 정효공주(貞孝公主) 묘비에 따르면, 문왕은 대흥보력금륜성법대왕’(大興寶曆金輪聖法大王)’이라는 존호를 사용했다고 한다. 나라가 크게 흥한다는 대흥을 연호로 사용했고, ‘금륜성법’(金輪聖法)이란 호칭에서 왕실이 불교를 수용해 불교국가로 번성했음을 알수 있다.

 

발해는 스스로 기록한 역사책을 남기지 않았다. 신라는 적성국이어서 발해에 관한 기록이 희박하다. 발해의 사료는 대부분 중국 기록에 의존한다. 그런 가운데 발해인 스스로 남긴 기록이 발견되었으니, 문왕의 둘째 정혜공주(貞惠公主)와 넷째 정효공주(貞孝公主)의 무덤이 타임캡슐처럼 1,200년의 세월을 뚫고 드러난 것이다.

언니 정혜공주 무덤은 19498월 중국 지린성 둔화시 육정산에서 발굴되었고, 동생 정효공주의 무덤은 1980년에는 중국 지린성 허룽현 용두산에서 발견되었다. 정혜와 정효 두 공주는 발해 3대 문왕의 둘째 딸과 넷째 딸이다. 정혜공주 무덤에서는 힘차고 생동감 넘치는 돌사자상 두 개가 발견되었고, 정효 공주 무덤에는 화려한 벽화가 12개가 그려져 있었다.

두 무덤에선 공히 묘지(墓誌)가 나왔다. 묘지는 무덤 앞에 세우는 묘비와 달리 무덤 안에 묻는 것이다. 두 공주의 묘지에는 매장자의 생애와 당대의 시대상황이 기록되어 있어 가뜩이나 부족한 발해사를 풍부하게 했다. 두 무덤의 묘지문을 대조한 결과 문장과 배열이 거의 비슷하다는 점에서 발해 왕실이 묘지 양식이 있었음을 보여주었다.

 

정혜공주묘 /동북아역사넷
정혜공주묘 /동북아역사넷

 

정혜공주는 언니가 있었으니 일찍 죽었기 때문에 사실상 장녀였다. 737년에 태어나 777년 마흔의 나이에 사망했다. 21725자의 비문은 파손이 심해 그중 234자는 무슨 글인지 알아볼 수 없었지만 나름 그녀의 인생 굴곡이 드러났다. 묘지명에 따르면, 공주는 출가를 했으나 남편과 아들, 딸을 먼저 보내 슬픈 나날을 보냈다.

님이 일찍 세상을 떠나 이승과 저승의 길이 달라, 두 새가 홀연 등을 돌리고, 두 칼은 끝내 외롭게 되어버렸다.(所天早化 幽明殊途 雙鸞忽背 兩劍永孤) 어린 아들이 일찍 죽으매 젊은이에도 이르지 못하였구나.(稚子又夭 未經諸郞之日) 어린 딸이 요절하매 방추를 가지고 놀던 때도 이르지 못하였구나.(稚女又夭 未逢弄瓦之日)” (김진광)

서울대 송기호 교수의 분석에 따르면, 정혜공주묘와 묘비는 고구려와 당의 것을 모두 지니고 있다. 고구려적 요소로는 묘의 구조가 고구려 후기의 석실봉토분과 일치하고 매장법도 연결되고 있다. 당나라 요소로는 널길(羨道)2점의 돌사자와 묘비를 설치했다는 점, 묘비의 형태와 비문의 내용이 당풍을 반영하고 있다는 점 등이다.

 

정효공주묘 벽화 /동북아역사넷
정효공주묘 벽화 /동북아역사넷

 

1980년에는 정효공주의 묘비가 온전하게 보존된 상태로 발견되어 발해 연구자들을 흥분시켰다. 게다가 정효공주 묘에는 벽화도 있어 당대의 생활상을 엿볼수 있었다.

동생은 언니보다 20년 후에 태어났다. 757년에 태어나 7926월에 36세를 일기로 사망했고, 종효공주도 남편을 먼저 세상을 떠났다. 묘도는 남쪽에 계단식으로 두 번에 걸쳐 만들었고, 무덤에 남녀 각 1인의 인골이 출토되어 공주와 남편의 관이 함께 묻힌 것으로 보인다.

네 벽은 벽돌로 쌓은 양식이다. 이 방식은 당나라 양식인데, 돌로 공간을 줄여 나가면서 천장을 쌓는 고구려 양식이 결합되어 있다.

무덤은 일찍이 도굴되어 유물이 제대로 남아 있지 않았다. 하지만 벽화는 남아 있었다. 벽화는 널방의 동··북쪽 벽과 널길의 동·서쪽 벽에 그려져 있었고, 당시 발해인의 모습을 보여주었다. 모두 12명인 인물상은 무사(武士), 시위(侍衛), 내시(內侍), 악사 등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다만 무덤 주인은 그려져 있지 않다. 인물은 대체로 뺨이 둥글고 얼굴이 통통한 당나라 화풍을 보여주고 있다.

정효공주묘비문은 앞면에만 모두 18728자가 새겨져 있으며, 이 중 719자가 판독 가능하다. 비문에서는 중국의 유교 경전과 역사서들을 두루 인용하고 있으며, 변려체 문장을 구사하고 있다.

아버지는 두 딸을 먼저 보내고 슬퍼했다. 딸을 아끼던 마음이 묘비명에 녹아 있다. 문왕은 죽은 딸들을 그리며 나랏일도 하지 못하고 음악을 연주하는 것도 금지시켰다고 한다.

 


<참고한 자료>

발해 정혜공주묘비의 고증에 대하여, 송기호, 1981, 서울대

발해 정효공주묘 동서 벽화의 재해석, 김성혜, 2008, 영남대

동북아역사넷, 정효공주묘

세계일보, 발해공주의 초대(김진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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