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해⑫…동경의 정변
발해⑫…동경의 정변
  • 김현민 기자
  • 승인 2023.08.27 12: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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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경 천도와 상경 환도 사이에 권력갈등 폭발…상경은 장안성 다음으로 큰 도성

 

발해 3대 문왕 대흠무(大欽茂)는 시조 대조영의 손자로, 재위기간이 56(737-793)으로 길다. 발해 227년의 4분의1을 문왕이 다스렸다. 문왕은 선대가 건국 과정의 혼란을 보낸 후였기에 발해를 안정적 기반 위에 올려놓았다는 평가를 받는다. 대외적으로 국토를 팽창시키고 대내적으로 정치와 문화의 발전을 이룩했다. 3대 임금에 가서야 발해는 건국초기에 산중에 급조했던 방어진지에서 내려와 평지에 도읍을 세울수 있었다.

 

발해는 네 번에 걸쳐 수도를 옮겼다. 그중 문왕 시기에 세 번의 천도가 있었다. 네 번째 천도는 문왕이 죽고 1년후에 이뤄졌으므로, 문왕과의 연관성을 배제할수 없다.

첫 번째 천도는 742(문왕 6)년 건국지인 구국(舊國)에서 현주(顯州)로 이동한 것이다. 구국은 시조인 대조영(고왕)2대 무왕이 잠든 곳으로, 발해의 발상지였다. 하지만 수세적 입장에서 동모산(東牟山) 산중에 건설한 도읍이었으므로, 늘어난 영토의 효율적 통치와 국력의 배양에 걸맞지 않았다. 그래서 옮긴 곳이 현주였다. 현주는 나중에 5경 체제로 전환했을 때 중경 현덕부(中京顯德府)로 전환된 곳으로, 지금의 지린성(吉林省) 허룽시(和龍市) 서고성(西古城)으로 비정된다.

문왕은 중경에서 오래 머물지 않았다. 14년 지나 756(문왕 20) 수도를 상경 용천부(上京龍泉府)로 옮겼다. 상경성은 785년 동경 용원부(東京龍原府)로 천도할 때까지, 그후 794년 다시 이곳으로 천도해 발해가 멸망한 926년까지 수도였다. 두 번의 기간을 합치면 상경은 160여년간 수도였는데, 발해 존속기간의 70%에 해당한다. 상경성은 그 규모나 도시구조를 보아 발해의 수도를 대변한다.

네 번의 천도는 742~79450년 사이에 일어난다. 그중 첫 번째 중경 천도와 두 번째 상경 천도는 국가발전 과정에 따라 통치하기 적합한 곳으로 찾아가는 과정이므로 별다른 이견이 없다. 문제는 세 번째 동경 천도와 네 번째 상경 복귀 과정의 혼란이다. 10년도 안 되는 기간의 두 번의 천도에 관해 역사학자들은 많은 해석을 쏟아낸다.

 

발해 5경과 네 번의 천도(송기호) /양시은 논문 캡쳐
발해 5경과 네 번의 천도(송기호) /양시은 논문 캡쳐

 

발해는 8세기말 두 차례 천도를 단행했다. 785년경 동경천도와 794년 상경환도다. 이 과정에 정치적 격변이 있었다. 이 시기를 조명해 본다.

동경은 고구려의 책성(柵城)으로, 지린성 훈춘(琿春)의 팔련성(八連城)으로 비정된다. 이곳에 유적이 다수 발굴되면서 동경이라는데 의견이 합치되고 있다. 그렇다면 문왕이 재위 49년째인 785년에 왜 동쪽으로 세 번째 천도를 단행했을까.

동경천도의 일반론은 내분설이다. 문왕의 통치력이 약화되고 상경파와 동경파 사이에 권력투쟁이 일어나 동경에 기분을 둔 세력이 천도의 주도권을 행사했다는 것이다. 이 논리는 사료를 근거한 것은 아니다. 문왕 사후 나랏사람들(國人)이 왕권교체에 관여했다는 중국 사료를 근거로 한 추론이다.

일본 사학계는 발해가 일본과의 동맹관계를 강화하기 위해 동경 천도를 단행했다고 주장한다. 일본으로 출항하는 항구가 훈춘에 인접해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동경을 도읍으로 하던 9년 동안에 일본에 사신이 많이 파견되었다는 자료는 달리 없다. 일본이 만주국을 수립하기 전후해서 발해사를 견강부회한 것으로 볼 수밖에 없다. 문왕 시절에 발해의 주요한 외교상대국은 당나라였는데, 굳이 일본과 가까워지기 위해 동해 근처로 왕이 궁궐을 옮길 까닭은 없다.

권은주 경북대 교수는 동경천도 전까지 발해의 내분을 확인할수 없으며, 당시 당나라에서 일어난 정치혼란에 주목했다. 권은주는 논문(2010)에서 당()에서 일어난 번진의 난과 회홀(回紇, 위구르)의 정세변동을 동경천도의 배경으로 보았다. 안록산·사사명의 난(755~763)이 일어났을 때 당은 자체의 무력으로 난을 진압하지 못하고 회홀의 힘을 빌렸다. 그후 당의 지방 절도사들은 독자세력으로 성장했고, 번진의 난이 일어났다. 산둥반도에 이정기의 치청번진(淄靑藩鎭)이 발해의 대당외교의 중간에 끼어들어 무역이 위축되었다. 이에 발해 문왕은 서쪽의 혼란이 가져올 복속 민족의 이탈을 막고 연해지역의 말갈을 정복하기 위해 동경으로 천도했다는 것이다.

 

발해 왕가의 가계 /권은주 논문 캡쳐
발해 왕가의 가계 /권은주 논문 캡쳐

 

동경천도의 이유를 설명한 사료는 없다. 그에 비해 상경환도는 명확한 사료적 근거가 있다.

왕실을 동경으로 옮긴 이후 발해 정국은 급속도로 혼미에 빠졌다. 문왕은 노쇠했다. 문왕은 계승자로 아들 대굉림(大宏臨)을 지명했는데, 대굉림은 문왕에 앞서 사망했다. 누이 정효공주의 비문에 동궁의 존재가 확인되므로, 대굉림은 정효공주가 죽은 79269일과 문왕이 죽은 79334일 사이에 사망했다. 정효공주가 누나이므로 대굉림은 누나의 사망 나이 36세를 넘지 않는다. 1년도 안 되는 시기에 동궁 대굉림과 문왕 대흠무가 동시에 사망하자 후계자 문제가 대혼란에 빠졌다. 왕위승계 우선순위는 대굉림의 동생 대숭린(大嵩璘)과 대굉림의 아들 대화여(大華璵) 중 하나일 것이다. 그런데 승계 순위에 밀려 있는 대원의(大元義)가 문왕을 이어 4대왕에 올랐다. 사서에 대원의는 문왕의 족제(族弟), 즉 일가 동생으로 되어 있다. 대조영의 후손이나, 왕가 직계에서 먼 인물임은 분명하다.

대원의의 왕위 계승에 대해 사료적 설명은 없다. 정식 계승인지, 찬탈인지도 분명치 않다. 다면 중국사서에 문왕의 아들 굉림이 일찍 죽어 원의가 왕이 되었으나, 왕위에 있은지 1년만에 의심이 많고 잔인하다(猜虐) 하여 나랏사람들(國人)이 죽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여기서 국인은 상경에 남아 있던 왕족과 귀족이었을 것이다. 상경의 세력과 동경의 대원의 세력간의 권력투쟁이 벌어 졌고 이 과정에서 대원의가 패했다. 그는 반정세력에 의해 죽임을 당했고, 폐왕(廢王)이라고 했다.

 

대원의가 죽은 후 문왕의 손자이자 대굉림의 아들인 대화여가 왕위에 올랐으니 성왕(成王)이다. 성왕은 어렸기 때문에 작은아버지 대숭린이 섭정했을 가능성이 크다. 794년 성왕은 상경으로 환도했다. 동경으로 천도한지 9년만이다. 하지만 성왕은 오래살지 못하고 1년만에 사망했다.

역사학자들은 상경의 주도세력은 대숭린이었을 것으로 추정한다. 왕위계승은 문왕의 직계로 내려갔지만 대화여는 곧 세상을 떠났기 때문에 숙부 대숭린에게 왕위를 이어받았으니, 6대 강왕(康王)이다.

 

발해 상경에서 발굴된 녹유치미 복제품(중앙박물관) /박차영
발해 상경에서 발굴된 녹유치미 복제품(중앙박물관) /박차영

 

상경으로 환도한 이후 926년 거란()에 의해 멸망할 때까지 상경은 132년간 수도로 자리잡았다.

상경은 지금의 헤이룽장성(黑龍江省) 닝안현(寧安縣)으로 위도상으로 상당히 북쪽에 있다. 북방민족들은 대개 남하하는 경향이 있는데, 발해는 수도도 북쪽에 있었고, 영토도 북쪽으로 확대되었다. 송기호는 그 이유를 지구온난기로 설명한다. 당나라 시기가 지구의 온난기에 해당해 북방한계선이 북상했다는 것이다. 16세기에 지구의 온도가 내려가기 전까지 온난기에 만주 하얼빈-장춘 일대의 평야가 저습지대로 변해 사람들이 거주하기에 적합하지 않았고, 발해는 지린성 동부 산림지대에서 건국했다는 견해다.

상경성이 자리잡고 있는 헤이룽장성 벌판은 지린성 둔화 벌판보다 넓다. 상경성의 성벽 둘레는 16km에 달해 당시 동아시아에서는 당나라 장안성(長安城) 다음으로 큰 도성이었다고 한다. 한양도성 18.6km에 버금가는 도성을 서울보다 500년전에 구축한 것이다. 이곳에서는 지금도 발해의 유물이 솟아 나온다.

 


<참고한 자료>

8세기말 발해의 천도와 북방민족관계, 권은주, 경북대, 2010

발해 중경시기 대외관계의 양상과 의미, 윤재운, 대구대,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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