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해⑨…고구려보다 넓은 영토
발해⑨…고구려보다 넓은 영토
  • 김현민 기자
  • 승인 2023.08.10 13: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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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로 요동, 북으로 흑룡강, 남으로 대동강에 접해…한반도의 2.2~2.8배

 

발해의 영토는 얼마나 넓었을까. 발해의 강역에 대해 구당서엔 사방 2천리, 신당서엔 사방 5천리라고 했다. 역사학자들 사이에 발해의 강역에 대해 일치된 견해는 없다. 연구자들은 그동안 문헌자료를 통해 발해의 영토를 다양하게 규정해 왔으며, 최근엔 고고학적 발굴이 활발하게 진척되면서 발해 강역에 대한 새로운 연구들이 나오고 있다.

대조영(고왕)이 건국할 때 발해는 빠르게 속말말갈 부족들을 흡수하며 지린성을 중심으로 지배력을 확보했을 것이다. 2대 무왕이 727년 일본 천황에 보낸 국서에 무예(무왕의 이름)는 외람되게 여러나라를 주관하고 여러 번국을 아우르게 되어, 고구려의 옛 터전을 수복하고 부여의 풍속을 소유하게 되었습니다고 했다. 무왕 대에 발해가 고구려와 부여의 옛 영토를 거의 회복했음을 시사하는 대목이다.

 

문왕의 둘째 정혜공주 묘지(복제) /위키피디아
문왕의 둘째 정혜공주 묘지(복제) /위키피디아

 

발해의 영토에 관해 신당서 발해전에 남쪽은 니하(泥河)를 경계로 신라와 나란히 하였고, 동쪽은 바다에 이르렀으며, 서쪽으로는 거란과 접했다고 했다. 무왕은 732년 장문휴에게 군대를 주어 산둥반도 등주를 공격하고 요서에서 당군과 전투를 벌였다. 그후 당과 화평관계를 맺었고, 서부와 남부 영토를 굳힌 것으로 파악된다.

남부 국경은 735(성덕왕 34) “당 황제가 조칙을 내려 신라에 패강(浿江, 대동강) 이남의 땅을 주었다삼국사기 기록을 토대로 이때에 대동강~원산으로 굳혀진 것으로 보인다. 당시 신라는 강국이었으므로, 발해가 대동강 이남으로 내려가지 못했다.

당과의 외교관계 수립이후에도 발해는 말갈 정복을 계속했다. 7373대 문왕이 즉위한 이후, 철리부(鐵利部), 불열부(拂涅部), 월희부(越喜部), 우루부(虞婁部) 등이 발해에 편입되었다. 이들 말갈부족을 복속시킴으로써 발해는 동북쪽으로 영토를 확장했다. 신당서에 바다에 이르렀다고 했고, 연해주에 발해 유물이 대량으로 발굴된다는 점에서 발해는 동쪽으로 동해에 이르렀을 것으로 본다.

북부 경계에 대해선 논란이 있다. 흑수(黑水)말갈이 발해에 복속했는지 여부가 관건이다. 구당서 말갈전에는 오직 흑수부만이 온전히 번성하여”(唯黑水部全盛)라고 해 흑수말갈이 발해에 독립적이었던 것처럼 기록되어 있다. 이에 비해 신당서 흑수말갈전에는 오직 흑수만이 온전히 강성하여.”(唯黑水完彊)라고 했다가 뒤에선 나중에 발해가 번성하자 말갈은 다 그에 복속하고”(後渤海盛 靺鞨皆役屬之)라고 적었다. 흑수말갈이 버티다가 끝내는 발해에 복속되었음을 보여준다. 태평환우기와 당회요에서도 흑수가 발해에 속했다고 했다. 종합하건데, 흑수말갚도 시간이 걸렸지만 발해의 지도력을 인정했다. 따라서 발해의 북쪽 경계는 흑수말갈의 영역을 포함한다.

서쪽 경계에 대해서는 압륙강하구, 요하하구, 요동은 중국 영토이고, 그 동쪽이 발해의 영토로 보는 견해가 주류를 이루었다. 이 견해는 중국 학자들의 주장이었는데, 한국 학자들은 요동지역도 발해가 손에 넣었다고 주장한다. 서쪽 경계가 어디인지를 분명히 해줄 문헌은 드러나지 않는다. 요하 하류와 요동이 당나라와 발해의 완충지였다는 주장도 나온다. 오늘날처럼 국경을 선으로 긋던 시절이 아니었으므로, 발해 서변에 대한 논란은 지속될 것으로 보인다.

윤재운에 따르면, 발해의 강역은 10대 선왕(宣王)13대 대현석(대현석(大玄錫) 대에 가장 넓었다고 한다. 발해의 영역은 대체로 신라와 국경을 접하고 서쪽은 요양과 요동에 미치고 있었으며, 북쪽은 흑룡강과 우수리강이 합류하는 지점을 거쳐 동쪽으로 연해주에 뻗쳐 있었던 것으로 볼수 있다.

 

발해 유적 발굴지와 발해 강역도 /정석배 논문 캡쳐
발해 유적 발굴지와 발해 강역도 /정석배 논문 캡쳐

 

그러면 발해의 영토는 얼마나 넓었을까. 사학자 송기호는 발해가 중국의 랴오닝성, 지린성, 헤이룽장성, 러시아 연해주에 걸쳐 있었으며, 전체 넓이는 최소 50, 최대 65에 달했을 것으로 추산했다. 한반도 면적을 22로 어림잡을 때 발해는 한반도 면적의 2.2배에서 2.8배에 이르렀다. 통일신라의 영역과 비교하면 발해는 3.8~4.9배에 이르렀으며, 고구려 전성기에 비해서도 1.5~2배 넓었다. 발해를 우리 역사에 넣는다면, 최대의 강역을 확보한 나라였다.

 


<참고한 자료>

발해의 서북쪽과 북쪽 경계에 대해, 정석배, 2020, 고구려발해학회

발해를 다시 본다, 송기호, 2003, 주류성 출판사

발해 강역 연구의 현황과 전망, 윤재윤, 2018, 백산학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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