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해⑦…모피의 나라
발해⑦…모피의 나라
  • 김현민 기자
  • 승인 2023.08.08 13: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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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해산 모피가 중국과 일본에서 인기…담비길 통해 중앙아시아와도 무역

 

담비는 족제비과에 속하는 포유류로,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모피로 유명했다. 16세기에 동유럽의 러시아가 시베리아를 개척한 직접적 동기가 담비를 잡아 그 모피를 서유럽 귀족들에게 팔기 위해서였다. 담비 모피는 색채가 매우 아름답고 윤택이 나며, 털은 부드라으며. 가볍고 보온력이 뛰어나 모피 중 최상등으로 쳤다. 조선시대에는 담비 모피는 초피(貂皮)라 하여 당상관 이상의 고위직만이 입을 수 있었다. 담비의 서식지는 시베리아와 만주지역 삼림지대이며, 우리나라에도 함경도에서 조금이나마 잡힌다.

 

담비 /위키피디아
담비 /위키피디아

 

발해는 모피의 나라였다. 발해의 모피는 당나라와 일본에서 유명했다. 중국 사서 책부원구(冊府元龜)에 발해말갈이 당에 사신을 보내 초서피(貂鼠皮)를 조공으로 바쳤다는 기록이 여럿 등장한다. 발해의 담비모피는 일본에서 크게 인기를 끌었다. 일본 사서에 발해왕이 초피를 방물로 보냈다는 기록이 나온다. 서기 919년엔 이런 일이 있었다.

배구(裵璆)를 단장으로 하는 발해 사절단이 일본에 갔다. 배구는 다이고(醍醐)천황이 베푸는 연회장에 담비가죽 옷을 차려 입고 나갔다. 천황의 아들 시게아키라(重明) 친왕은 으스대는 발해사신의 꼴이 못마땅해 검은담비 가죽옷 8벌을 껴입고 나와 배구 일행을 맞았다고 한다. 그날은 음력 512, 양력으로는 6월쯤 되는 무더운 여름이었다. 사신의 기세를 꺾기 위해 한여름에 털옷을 덕지덕지 입고 나간 것이다. 그만큼 당대에 모피는 사치품이요 부의 상징이었다.

 

밀라노의 모피시장 /위키피디아
밀라노의 모피시장 /위키피디아

 

담비는 발해의 주요 조공품이자 수출품이었다. 발해 사학자 송기호에 따르면 발해는 당나라에 담비, 호랑이, 포범, 곰 등의 가죽과 인삼, 우황, 사향, 꿀 등의 약재, 마른 문어, , , , 구리 등을 수출했다. 일본에는 담비, 호랑이, 표범 등의 가죽과 인삼, 꿀 등을 수출했다. 토끼, 해태, 된장, 사슴, 돼지, , (), 명주, , , 붕어, 오얏, 배 등도 수출품목에 포함되었다. 여러 수출품 중에서 가장 눈에 띠는 것이 모피였다. 담비는 지금도 만주에서 서식하고, 중국정부는 담비를 국가보호동물로 지정, 보호하고 있다. 담비, 인삼, 녹용은 만주의 3대 보배로 꼽힌다.

 

발해 담비는 중국과 일본에만 간 게 아니다. 멀리 중앙아시아의 이란계 소그드(Sogd)도 발해산 모피를 거래했다는 연구가 나왔다. 러시아 학자 샤브쿠노프(E.V.Shavkunov)1985년에 발해와 여진의 유적들에서 발견되는 소그드-이란 계통의 유물들을 검토하면서 발해와 중앙아시아지역 간의 교역교통로가 있었다고 규명하고, 이를 담비길“(Sable road)이라고 명명했다.

이 러시아 학자가 담비길의 존재를 주장한 것은 연해주의 발해와 여진 유적지에 중앙아시아 이란계(소그드) 유물이 적지 않게 확인되었기 때문이다. 연해주 니콜라예프스카2 성에서 소그드계 청동거울이 출토되었고, 샤이가 성에서는 소그드어 또는 고대 위구르어 글씨가 적힌 청동저울추, 청동용기, 아랍어가 새겨진 철제패식이 나왔다. 니콜라예프스카 성의 유물은 발해 시대의 것이었고, 샤이가 성의 유뮬은 12~13세기 여진의 유물이었다.

또 캄차카에서 소그드 은화가 발견되었고, 유즈노-우수리스크 성터와 하바로프스크주에서 소그드 글자가 쓰여진 유리고리와 중앙아시아에서 7~12세기에 유행한 드라흐마 동전과 비슷한 은화가 발견되었다.

샤브쿠노프는 언어학적 근거도 제시했다. 흑수말갈의 추장 가운데 대막불만돌’(大莫拂瞞咄)이란 호칭이 있는데, 고대 중국어로 다 바크푸르 만도“(da bakfur manduo)로 읽는다. ‘바크푸르는 고대 이란어 종족들이 군주들을 부른 명칭 파그푸르’(fagfur)와 유사하며, 대막불만돌은 만주의 위대한 바크푸르로 해석된다는 것이다. 이 용어는 소그드인들과의 오랜 접촉을 통해서 생겨났다는 견해다.

또 실위(室韋)란 나라는 현대 몽골어로 쉬베르(shiwei)로 발음되는데, 고대 소그드인의 후손인 타지크인들의 언어로 소택지란 뜻이다. 실위가 아무르 강과 그 지류들의 저지 소택지에 살고 있었기 때문에 그곳을 가리키는 지명이 나라 이름 또는 종족 명칭이 되었을 거란 해석이다.

또한 7세기 후반에 수차에 걸쳐 중앙아시아의 토하리스탄에서 일단의 조로아스터교 신자들이 일본열도로 이주한 사건들도 담비길의 존재를 증명하는 증거로 제시되었다.

 

담비 길 /정석배 논문 캡쳐
담비 길 /정석배 논문 캡쳐

 

고대부터 만주지방에서 나오는 읍루(挹婁)담비가 유명했다. 중앙아시아의 이란인들도 이 모피를 구매하려 했다. 전통적인 무역로는 비단길인데, 이란인들은 비단길을 이용하지 않고 별도의 무역로를 개척한 것이다.

러시아 학자는 담비길의 노선을 구체적으로 적시했다. 그 길은 소그드의 거점인 카자흐스탄 남부 세미레치예(Semirechye)에서 출발한다. 이어 알타이 서몽골 셀렝가 강 유역 오르혼 강 상류 톨라 강 상류지역 헤룰렌 강과 오논 강 상류지역 쉴카 강과 아르

군 강 아무르 강 아무르 강 지류들을 따라 동북아시아의 깊숙한 곳들까지로 파악했다. 또 아무르 강과 연해주에는 담비길의 한 갈래가 크라스키노 성을 지나 일본과 신라로 이어지고, 다른 한 갈래는 북쪽으로 오호츠크해의 캄차카까지 연결된 것으로 파악했다.

 

담비 서식지 /위키피디아
담비 서식지 /위키피디아

 

그러면 왜 비단길을 놔두고 그 북방에 새길을 새길을 열었을까. 샤브쿠노프는 두 가지 이유를 들었다. 첫째는 중국 상인이 중앙아시아와 이란 상인들에게 모피가격을 지나치게 비싸게 불렀다는 것이다. 중국인과 중개거래하기보다 만주의 현지생산지와 직구(直購)할 필요성이 높아졌다는 것이다. 또다른 이유는 비단길 노선인 중앙이사아 지역에 당나라와 티베트, 투르크(돌궐)와의 전쟁이 끊임없이 벌어졌다는 점이다. 소그드 상인들이 안전한 교통로를 찾아 담비길을 만들었다는 것이다.

러시아 학자가 제기한 담비길에 대해 중국 학계는 부정적이다. 중국인들은 비단길 이외의 교통로의 존재를 인정하고 싶어 하지 않는 것이다. 국내 학자들 사이에도 담비길 이외의 교역로를 통해서 발해산 모피가 거래되었을 가능성이 있을 것이란 견해가 나온다.

어쨌든 발해는 중앙아시아와도 소통했다. 정석배의 논문에 따르면, 안귀보(安貴寶), 사도몽(史都蒙), 사도선(史道仙), 안환희(安歡喜) 등과 같은 소그드계의 사람들이 발해에 거주했고, 발해인 고공(高公)과 같이 서역에서 활동했다. 발해는 국제무역을 한 나라였다.

 


<참고한 자료>

발해의 북방-서역루트 '담비길' 연구, 정석배, 2019, 한국전통문화대학교

발해를 다시 본다, 송기호, 1999, 주류성출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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