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해⑪…연해주 경영
발해⑪…연해주 경영
  • 김현민 기자
  • 승인 2023.08.14 14: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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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주에서 연해주로 영토 확장…해양진출 계기, 일본과 교류 거점

 

발해의 영토는 중국 만주, 북한 함경도, 러시아 연해주 3개국에 걸쳐 있었다. 연해주는 1860년 베이징 조약으로 러시아 영토가 되기 이전에 만주 또는 여진족의 고향이었고, 1,000여년전에는 말갈족이 살던 곳이다.

발해는 10대 선왕(宣王) 대인수(大仁秀)의 재위시기(818?830)에 연해주 일대를 차지한 것으로 추정된다. 러시아 역사학지 Yu. G. 니키친은 역사지리서에 의거해 대인수 시기에 우루(虞婁), 불열(拂涅), 철리(鐵利), 부여(夫餘), 월희(越喜)의 땅이 발해 영토로 들어갔다는 기록에 주목해 연해주 지역이 이 시기에 발해의 영역으로 편입되었다고 보았다. 발해는 지방조직으로 515, 62주를 두었는데, 연구자들은 연해주 하산지구 크라스키노 성터(城址)가 염주(鹽州)이고, 수이푼강 유역이 솔빈부(率濱部)였을 것으로 비정한다.

 

연해주의 발해 유적지 /정석배 논문 캡쳐
연해주의 발해 유적지 /정석배 논문 캡쳐

 

연해주의 말갈 유적에 관해서는 러시아 학자들이 많이 연구했다. 한국과 중국 연구자들은 문헌자료를 중심으로 연해주의 발해를 연구했다면, 러시아 학자들은 문헌자료 외에 고고학적 발굴자료를 근거로 삼았기 때문에 보다 구체적이고 증거 능력이 높았다. 초기 러시아 학자들은 발해의 연해주 지배영역을 아무르강(黑龍江) 하류지역, 즉 연해주 전체로 보았으나, 1994A.L. 이블리예프의 연구에 힘입어 발해의 영역을 연해주 동부와 북동부 일부로 축소하게 되었다. 초기연구자 E.V. 샤브쿠노프도 이블리예프의 연구에 동의함으로써 대체로 연해주 남부로 발해의 영역이 굳어지는 경향이다. 따라서 발해의 영토 이외의 연해주 지역에서는 독립적인 말갈 종족들이 거주한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연해주 북쪽지역은 겨울이 길고 춥고 여름엔 습해 지금도 인구가 희박한 지역이다.

연해주 발해를 오래 연구해온 정석배 교수는 연해주 일대의 발해시기 유적 수를 315개로 파악하고, 이를 토대로 이블리예프의 견해를 지지했다. 정석배는 연해주의 발해 유적이 강 유역에 집중해 있다는 사실에 주목했다. 그는 강들이 발해의 경계가 지나는 것으로 해석했다. 예를 들어 라즈돌나야 강은 발해 전기, 일리스타야 강은 발해 중기, 아르세니예브카 강 혹은 우수리강 중상류는 발해 후기의 경계로 각각 해석했다. 이 중에서 가장 유적이 집중된 지역은 솔빈부가 위치하였던 곳으로 생각되는 라즈돌나야 강 유역이다. 이곳에는 135개소의 유적이 집중되어 있다.

 

러시아 학자들의 발해 강역도 /정석배 논문 캡쳐
러시아 학자들의 발해 강역도 /정석배 논문 캡쳐

 

신당서에 발해 5경의 하나인 동경용원부(東京龍原府) 아래에 경주(慶州), 염주(鹽州), 목주(穆州), 하자(賀州)4개주가 있었다고 전한다. 한국학중앙연구원 구난희 교수는 동경(東京)을 지린성 훈춘시 팔련성(八連城)으로 비정하고, 경주(慶州)는 훈춘의 온특혁부성(溫特赫部城), 염주(鹽州)는 크라스키노, 목주(穆州) 또는 하주(賀州)는 연해주 내지는 북한 동해안 일대로 비정했다. 따라서 동경이 두만강 하류를 중심으로 한 중국의 훈춘시 일원, 함경북도 그리고 러시아의 연해주를 관할한 것으로 보았다.

 

연해주의 발해 유적지 가운데 가장 뚜렷한 것은 성곽이다. 발해 성곽에 대한 발굴조사는 50년 이상이 되었는데, 초기에 러시아 학자들에 의해 이뤄졌다. 1991년 소련 붕괴 이후 한국과 일본 학자들이 참여해 공동조사를 통해 발해 성곽에 대한 정보가 많아지고 깊어졌다.

현재까지 연해주에서 발해 성곽으로 확인된 것은 모두 15개다. 이중 평지성은 11, 산성이 4개다.

대표적인 성이 크라스키노성이다. 하산지구 크라스키노 마을에서 2km 떨어진 곳에 위치한다. 샤프쿠노프가 이 성이 발해 염주의 중심도시였으며, 이 항구를 통해 일본과 교류했을 것으로 추정했다. 포시에트 항구를 끼고 있어 예로부터 항구의 배후 성이었음을 알수 있다. 발해 성곽중 가장 많이 조사한 성이다. 말발굽 모양을 띤다. 성벽 길이는 1,380m이고, 면적은 13.6ha. 성벽에 치와 옹성이 설치되었고, 문지는 세 곳, 성 내부는 동서로 넓은 길이 났다. 성 내부에 절터, 기와가마터, 우물, 주거지 등이 조사되었고, 토기, 기와, 금속류, 불상, 농기구, 무구 등이 출토되었다.

니콜라예프스카I 성은 미하일로프카지구 일리스타야강 왼쪽 강변, 니콜라예프크 마을 남쪽에서 3km 떨어진 곳에 위치한다. 1977, 2010년대에 여러차례 발굴조사가 이뤄졌다. 평면은 장방형이며, 240x295m로 넓이는 7.5ha이며, 성벽 높이는 2m. 성의 북동벽에는 두 번째 성벽이 이어졌는데 길이가 110m.

노보고르데예프카 성터는 강가에 솟아 있는 야산에 남아 있는데, 이곳에서는 야금(冶金)과 관련된 유물이 많이 발견되어 발해 시대에 수공업이 발달한 곳으로 여겨진다. 취락지에서는 중앙아시아적 요소의 유물들이 발견되어 이국인이 거주했던 곳으로 추정되기도 한다.

 

연해주 시넬니코보 발해 보루 /문화재청
연해주 시넬니코보 발해 보루 /문화재청

 

연해주 일대는 발해에서도 변방이었다. 중심지역인 헤이룽장성의 상경 지역, 지린성의 중경과 동경 지역과 수로로 연결되었고, 북한 함경도의 남경지역권과 수로로 교류했다. 발해가 국력이 커지면서 연해주 지역으로 확장했고, 말갈족을 복속시킨 이후에 그들의 저항에 대비하기 위해 성곽을 축조한 것으로 보인다.

평지성은 행정적 지배를 위해 축조된 것으로 파악된다. 일부 성은 발해가 멸망한 이후 금()왕조에도 사용된 것으로 보인다. 평지성은 둘레가 600~2,500m의 중형 또는 중대형이 대부분이다. 그 이하의 소형 또는 그 이상의 대형은 눈에 띠지 않는다.

산성은 시넬니코보-1, 노보고르데예프카, 크라스나야 소프카-2, 이즈베스트코바야 소프카 등 4개가 확인되었다. 성곽은 모두 산과 언덕에 위치해 있기 때문에 방어에 유리한 입지조건을 갖추었다. 산성 규모는 면적 3~5ha이고, 둘레는 700~1,000m로 소형이다. 중대형과 대형산성은 확인되지 않는다.

 

연해주는 발해 동경의 관할권에 속했다. 8세기말 수도를 동경에서 상경으로 옮긴뒤 연해주 지역은 수도에서 더 멀어졌다. 따라서 지방조직은 변경지역 행정과 수호를 위해 성곽을 쌓았던 것으로 분석된다. 말기에 흑수말갈과 자주 전쟁을 벌이며 성곽의 중요성이 강조되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발해의 연해주 경영은 만주 중부에서 동해안으로 무대를 확대해 해양국가로 활약한 나라였음을 입증한다.

 

연해주의 발해 성터 현황 /스토야킨 막심 논문 캡쳐
연해주의 발해 성터 현황 /스토야킨 막심 논문 캡쳐

 


<참고한 자료>

연해주 발해시기의 유적 분포와 발해의 동북지역 영역문제, 정석배, 2011, 고구려발해연구

발해 동경 지역의 역사적 연원과 지역성, 구난희, 고구려발해학회, 2017

연해주 발해성곽의 구조와 성격, 스토야킨 막심, 국립문화재연구소, 2017

발해를 다시 본다, 송기호, 주류성출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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