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해⑭…대야발의 후손
발해⑭…대야발의 후손
  • 김현민 기자
  • 승인 2023.08.30 18: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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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왕 때 연해주까지 영토확장, 흑수말갈 제압…“해동성국” 불리며 전성기 국가

 

발해는 서기로 698년에서 926년까지 228년간 존속했던 나라로, 역대 15명의 왕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한다. 발해는 자체 사서를 갖고 있지 않고 중국과 일본의 사서에서 발해의 역사를 짚어내기 때문에 공백이 많다. 건국자 대조영(大祚榮)에서 13대 대현석(大玄錫)까지는 신당서 발해전에 기록되어 있고, 대현석 이후 대위해(大瑋瑎), 대인선(大諲譔)도 확인된다. 다만 그 사이에 또다른 왕이 재위했는지는 확인되지 않아 15명의 왕이 있었다고 한다. 일부에선 왕 하나가 더 있어 16대로 보는 견해도 있다.

시조 대조영의 직계후손은 9대 간왕 대명충(大明忠)까지다. 10대 이후는 대조영의 직계의 끊어져 대조영의 동생 대야발(大野勃)의 가계로 넘어간다. 10대 왕은 선왕(宣王) 대인수(大仁秀). 그 이후 멸망할 때까지 대씨 왕조는 방계로 이어갔다.

 

대야발은 걸걸중상(乞乞仲象)의 아들이자 대조영의 아우인데, 그에 대해 전해지는 내용은 없다. 다만 대종교에서 그가 단기고사’(檀奇古史)의 저자라고 주장한다. 단기고사는 대야발이 형 대조영의 명을 받아 왕 11(729)에 완성한 것이라고 한다. 역사학계에서 단기고사는 위서로 본다.

어쨌든 대야발의 4대손 대인수가 10대왕이 된다. 대인수의 승계는 찬탈일까? 그렇게 보여지진 않는다. 대조영 직계의 혈통이 끊어졌기 때문에 어쩔수 없이 방계가 왕위를 승계한 것으로 보인다.

3대 문왕 대흠무가 56년간 장기 재위하는 과정에서 정상적인 승계가 뒤틀어졌다. 후계자였던 아들 대굉림(大宏臨)이 먼저 죽고 손자는 어렸다. 793년 문왕이 죽자 족제(族弟)로 표현되는 대원의(大元義)가 왕위에 올랐다. 대원위의 즉위는 찬탈로 해석된다. 1년만에 대원위는 나랏사람(國人)에 의해 폐위되고 다시 문왕의 손자가 왕권을 되찾아 성왕(成王)에 오른다. 성왕은 임금에 올라 1년도 넘기지 못한채 사망하고 숙부 대숭린(大嵩璘)이 강왕으로 즉위했다.

강왕 이후에도 왕권이 안정되지 않았다. 794년에서 818년까지 왕이 4명이나 교체되었다. 강왕(재위 794~809)15년 재위한 이후 그의 아들 정왕(定王) 대원유(大元瑜)3, 동생 희왕(僖王) 대언의(大言義)5, 또다른 동생 간왕(簡王) 대명충이 1년간 돌아가며 왕위에 올랐다. 정왕, 희왕, 간왕은 모두 어렸고, 후계자가 없었을 가능성이 크다. 결국 대조영 직계에 대가 끊어졌고, 대야발 가문에서 왕을 찾아야 했을 것이다.

 

대조영이 나라를 세운지 120년이 되던 시기에 대야발계의 대인수가 왕권을 차지했다. 대인수는 앞서 세 왕의 나이가 어렸기 때문에 일찍부터 섭정으로 활동했을 가능성이 있다. 강왕이 사망하자 임시로 국사를 맡았다. 다른 가문의 찬탈을 막기 위해서도 국정을 틀어쥐었을 것이다.

대인수는 바로 당나라에 사신을 보냈다. 전왕의 부음으로 알라고 자신이 정당한 승계자로서 책봉을 받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당 헌종은 대인수의 즉위를 흔쾌히 승인하고 은청광록대부(銀靑光祿大夫) 검교비서감(檢校秘書監)으로 책봉했다. 선종은 즉위초기인 8198202년간에 무려 16회나 조공사를 보냈다. 당의 지지를 얻기 위해서였다. 그러자 820년에 당은 대인수에게 금자광록대부(金紫光祿大夫) 검교사공(檢校司空)으로 봉해 한등급 높여 주었다.

대조영과 그 후손들은 발해의 건국과 기초를 세웠다면 대야발의 후손들은 발해의 영토를 확장하고 전성기를 구가했다. 신당서 발해전에 당은 대인수가 바다 북쪽의 여러 부(諸部)를 토벌하고 영토를 넓혀 공훈이 있으므로 검교사공으로 봉한다고 했다.

신당서에 선왕이 해북(海北)의 여러 부족을 쳐서 대경우(大境宇)를 개척하여 영토를 넓혔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는 발해가 연해주 지역으로 진출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발해와 갈등관계에 있었던 흑수말갈이 815년을 마지막으로 당나라에 조공하는 것을 중단하는데, 이는 발해가 흑수말갈을 압박해 대당 외교의 통로를 단절하고 흡수한 것으로 풀이된다. 발해의 최대영역은 선왕 대 이뤄진 것으로 보인다.

 

발해의 최대영토 /위키피디아
발해의 최대영토 /위키피디아

 

선왕은 당나라, 일본과 외교, 무역을 활성화시켰다. 재위 12(818~830) 동안 당에 24회 조공하고 일본에 여섯차례 외교사절을 보냈다. 산둥반도에는 발해관이 있을 정도로 당나라와의 무역이 활발했다.

발해 무역상으로 인해 일본의 무역역조는 심해졌다. 825년 일본의 우대신(右大臣) 후지와라노 오츠구(藤原緖嗣)는 발해 사신 일행이 상업을 하는 무리이며, 그들을 대접하는 것은 일본의 경제적 손실을 초래한다며 도성에 들어오는 것을 제한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왕 시기인 82512103명의 대규모 사신단이 일본에 건너갔다. 발해 사신단은 외교 활동 이외에도 초피(貂皮)를 비롯한 상품을 거래하는 상업 활동에 주력했다. 발해사절단이 너무 자주오자 827년에 이르러 일본은 12년마다 한 번씩 사신을 받기로 제한했을 정도였다.

신라와는 대치관계에 있었다. 유득공은 발해고에 선왕이 신라를 정벌했다(王南征新羅)고 했다. 하지만 삼국사기의 같은 시기에 발해의 신라 침공 사실이 특별히 기록되지 않았다. 양국이 서로 긴장관계를 유지했던 것 같다.

 

선왕이 죽고 손자 대이진(大彛震)11대 왕에 올랐고, 그의 통치기에도 발전은 지속되었다. 대이진의 재위기간(830~858)에 당의 사신 장건장(張建章)이 발해를 방문했다가 돌아가 ?발해국기를 지었고, 그 기록이 신당서에 실려 있다. 대이진의 재위기에 발해는 51562주를 두었고, 20만명의 병력을 보유했다. 군사력이 무왕 대무예 때보다 두배나 증대되었다. 당나라는 발해를 해동성국’(海東盛國)이라고 호칭했다. 이 모든 것이 선왕이 이뤄 놓은 결과로 해석된다.

 

발해 왕가의 계보도 /자료=일본 위키피디아
발해 왕가의 계보도 /자료=일본 위키피디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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