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해⑩…동해를 내해로 삼다
발해⑩…동해를 내해로 삼다
  • 김현민 기자
  • 승인 2023.08.12 16: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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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년간 일본에 34회 사신 파견 교류…계절풍과 해류 활용해 해로 개척

 

발해에 관한 기록이 가장 많이 남아 있는 곳이 중국이고, 그 다음이 일본이다. 발해는 전략적으로 일본에 접근했다. 건국 초기에 발해는 당-신라에 적대관계였기에 외교적 고립을 피하기 위해서 일본과 친교를 맺어야 했다.

건국한지 29년째 되는 727, 3대 무왕은 일본 쇼무(聖武)천황에 국서를 보내 국교를 수립했다. 무왕은 국서에서 여러 나라를 주관하고 여러 번국을 아우르게 되어 고구려의 옛 터전을 수복하고 부여의 풍속을 소유하게 되었다고 했다. 고구려의 후계국임을 밝히고 외교관계 수립을 제의한 것이다. 그러면서 담비가죽 300장을 선물로 보내면서 수교를 요청했다. 일본사서 속일본기에 나오는 내용이다.

첫 번째 대일사절단이 일본으로 가는 도중에 사신 고인의(高仁義)를 비롯해 많은 사람들이 파도에 휩쓸려 죽고, 도착해서 에조(蝦夷)라고 불리는 원주민들의 공격을 받아 고제덕(高齊德) 등 일부만이 간신히 살아남았다. 24명의 사절단이 출발했으나 8명만 살아 겨우 임무를 수행하게 되었다. 이처럼 발해는 초기에 동해 해류와 바람을 파악하지 못했다. 어렵게 동해를 건넌 사신들은 일본과의 연대를 구축했고, 그 외교기반을 토대로 5년후 무왕은 당나라 등주를 공격하게 된다.

전략적 필요성에 의해 체결된 발해-일본의 동맹은 926년 발해가 멸망하기까지 200년동안 이어졌다. 발해는 5경을 두었고, 수도를 다섯 번 이사했는데, 그중 하나가 동경 용원부다. 그곳은 중국 훈춘(琿春) 인근으로 비정되는데, 이곳을 중시한 이유는 동해를 활용하고 대일관계를 활성화하기 위해서였다.

 

발해~일본항로 /정채호 제공
발해~일본항로 /정채호 제공

 

발해는 희생을 감수하며 동해를 개척했고, 200년동안 34회의 사절단을 일본에 보냈다. 6년에 한번 꼴로 보낸 것이다.

발해와 일본의 관계는 점차 무역으로 전환되었다. 일본 궁터에서 화동(和同)연간(715~729)의 것으로 추정되는 발해의 목간이 발견되었는데, 이 목간에 교역(交易)이란 글자가 여러 차례 표기되었다.

발해는 일본에 담비가죽, 호랑이가죽, 말곰가죽, , 인삼, 명주, ·동과 같은 광물, 곤포와 같은 수산물을 수출했다. 주로 토산품이었다. 이외에도 대모라는 붉은바다거북의 껍질로 만든 술잔을 비롯해 해표피, 해상어 등으로 만든 각종 수공업제품 등을 수출했다.

처음엔 바다가 무서워 소수의 사람들이 배를 탔다. 하지만 점차 그 승선인원이 늘어났다. 해상의 흐름을 알게 되고 조선기술이 발달했기 때문이다. 점차 상인들도 바다를 건넜다. 윤명철 교수에 따르면, 746년에는 발해인과 철리(鐵利)말갈인 1,100명이 일본에 갔다. 범선을 이용하던 시기에 이렇게 많은 인원이 동해를 건넌 것은 그만큼 동해의 해류와 바람 방향을 읽었다는 것이고, 그만큼 선박 제조기술이 발달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871년엔 양성규가 사신으로 일본에 건너갔을 때 일본 황실이 지불한 물건 값이 49만냥에 이르렀다. 일본 왕가와 귀족층에 발해산 담비가죽이 유행한 것은 유명한 일화다.

발해 상인이 일본에서 가져간 물건은 면, 비단, 수은, 식유 등이었다. 절대적으로 발해의 수출이 많았고, 일본은 발해에 대해 무역역조를 면하지 못했다. 그렇게 되자 일본은 발해에 대해 무역규제 조치를 단행했다. 일본은 사무역을 금하고, 사신 입국을 12년에 1회 오도록 규제하며, 인원수도 105인 이내로 제한했다. 이를 어길 경우 추방한다고 했다. 나중엔 발해 사신으로 하여금 규슈의 다이자후(大宰府)를 거치도록 의무화했는데, 에조의 공격으로부터 보호한다는 그럴싸한 명분을 갖다 붙였다.

 

그러면 발해인들은 어떤 해로를 이용했을까. 해양학자 윤명철에 따르면 동해에는 4월 중순부터 9월까지 동남풍이 불며, 9월 하순부터 다음해 3월까지 서북풍이 분다. 따라서 발해에서 출발하는 배는 겨울에 북쪽에서 부는 바람을 이용하다가 남하하는 한류를 올라타고 일본에 이르고, 여름에 그 반대로 움직인다. 발해 사신은 겨울에 떠나 이듬해 여름에 오는 것이다.

출발지는 블라디보스톡 인근 포시에트, 도착지는 일본 동해 쓰루가(敦賀)로 추정된다. 윤명철, 송기호 등은 이렇게 보았다. 이에 대해 북한은 포시에트가 겨울에 얼기 때문에 나진에서 출발했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또 함흥 근처에서 출발했다는 견해도 있다.

현대에 발해~일본의 옛 항로를 탐사하려는 노력은 두 번이나 시도되었으나 실패했다. 1998년 발해뗏목탐사대가 러시아 블라디보스톡 공해상에서 출발했다가 일본 도고섬 앞바다에서 좌초되어 탐사대 4명이 사망했다. 2005년에도 재도전에 나섰으나 표류해 우리 해경에 구조되기도 했다. 그만큼 동해바다가 어렵다는 것을 말해준다.

 

2005년 발해탐사 뗏목 /이효웅 제공
2005년 발해탐사 뗏목 /이효웅 제공

 

발해와 일본은 서로 문물을 교류했다. 일본이 당나라로 건너갈 때 신라를 거치지 않고 발해를 경유해 갔다. 석정소(釋貞素)라는 발해 스님은 일본 천황과 당나라에 유학하는 일본승려 레이센(靈仙) 사이에 심부름을 하느라 당나라와 일본을 오가다가 랴오둥반도에서 풍랑을 만나 목숨을 잃기도 했다. 동해바다 건너 일본 해안에는 발해 사신과 관련한 유물들이 남아 있다.

발해측에서도 일본 사신의 내왕을 도왔다. 속일본기에 따르면 779, 고닌(光仁)천황은 사신을 발해에 보냈는데, 사신을 실은 배가 동해를 건너다가 험한 파도와 폭풍우 때문에 파손되었다. 이에 발해는 염주(크라스키노)에서 두 척의 배를 새로 만들어 일본 사신들의 귀국을 도왔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일제 시대에 일본인들이 발해 궁전을 발굴하다 일본 화폐 와도카이친(和同開珎)이 발굴되어 흥분한 적이 있다. 일본에서 발굴된 목간에 발해사(渤海使)란 글자가 쓰여진 것이 나왔다.

발해 사람들은 타구, 격구 경기를 일본에 전해주었다. 이 경기는 일본에서도 인기가 있어 발해사신 왕문구(王文矩)822년 일본에 와서 천황 앞에서 타구 경기를 시연했고, 천황은 신하들과 내기를 걸었다.

발해 사절단은 일본에 한번 가면 계절풍을 기다려야 하므로 이듬해 여름까지 기다려야 했다. 그때 부인을 그리워하며 쓴 양태사(楊泰師)한밤의 다듬이소리’(夜聽擣衣聲)가 속일본기에 남아 전해진다.

밤에 다듬이소리를 들으며/ 서리 하늘 달 밝은데 은하수 빛나 /나그네는 돌아갈 생각 깊도다. /긴긴 밤 시름에 겨워 오래 앉아 있노라니 /홀연 들리는 이웃 아낙의 다듬이소리 /바람결 따라서 끊어질 듯 이어지며 /밤 깊어 별이 기울도록 잠시도 멎지 않네. /고국을 떠난 후로 저 소리 못 듣더니 /지금 타향에서 들으니 소리 서로 비슷하네. /

 


<참고한 자료>

8세기 후반 발해와 일본의 경제외교, 조이옥, 영산대, 2006

89세기 발해와 일본의 경제외교와 大宰府, 박진숙, 고구려발해연구, 2006

한국해양사, 윤명철, 학연문화사, 2003

발해를 다시본다, 송기호, 주류성출판사, 19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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