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해①…고구려의 빈자리
발해①…고구려의 빈자리
  • 김현민 기자
  • 승인 2023.06.17 21: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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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 평양에 안동도호부 설치…고구려 유민, 당에 끌려가거나 고향에서 탈주

 

보장왕이 재위에 오른지 27년째 되던 서기 668, 당 고종은 유인궤를 총사령관으로 삼아 대부대를 요동으로 이동시켰다. 이적이 야전에서 군대를 지휘했다. 당군은 부여성을 점령하고 압록강을 넘어 9월에 평양성을 점령했다. 김부식은 삼국사기에 고구려의 멸망 순간을 이렇게 적었다. “승려 신성이 성문을 열자, 이적이 병사를 풀어 성 위에 올라가 북을 치고 함성을 지르며 불을 지르게 하였다. 천남건은 스스로 칼을 들어 자신을 찔렀으나 죽지 않았다. 임금과 천남건 등이 붙잡혔다.”

그해 10월 당 고종은 보장왕과 그 신하들을 아버지 태종의 무덤(昭陵)을 참배케 했다. 당 태종은 고구려를 침공했다가 안시성 전투에서 눈에 화살을 맞아 시름시름 앓다가 죽었다는 소문의 주인공이다. 고종은 이적에게 군용을 갖추어 개선가를 부르며 도읍으로 들어와 다시 대묘(大廟)에도 참배하도록 했다.

 

고구려는 5, 176, 697,000호였다. 15인으로 본다면 350만명의 인구다. 당은 고구려 수도 평양에 안동도호부를 설치했다. 또 지역을 9도독부, 42, 1백 현으로 나누었다. 한사군이 완전히 물러난지 350여년만에 다시 한반도 북부와 만주가 중국 지배로 떨어진 것이다.

당은 점령지를 기미부주(羈靡附州) 체제로 편입시켰다. 피지배 종족을 얽어매서 복종시키는 방식이다. 통치는 당 고종은 설인귀에게 검교안동도호(檢校安東都護)라는 직책과 병사 2만을 주어 옛고구려 지역의 통치를 맡겼다. 그 아래에는 당나라에 협조하는 고구려인 가운데 발탁해 도독, 자사, 현령으로 삼았다.

 

고구려 멸망직후 당의 영토와 신라 편제 /위키피디아
고구려 멸망직후 당의 영토와 신라 편제 /위키피디아

 

당이 고구려에 한 첫 번째 조치는 사민정책(徙民政策)이었다. 피점령종족을 고향에서 떼내서 멀리 이동시키는 정책이다. 삶의 터전을 빼앗아 저항력을 약화시키고, 아울러 다른 종족과의 전쟁에 투입시키기 위함이었다.

점령 이듬해인 6694, 당은 고구려 유민 28,300호를 이주시켰다. 멸망 당시 총인구의 4%에 해당한다. 순순히 따라가는 사람은 없었을 것이다. 멸망한 나라, 피지배국의 백성은 소모품이었다. 그들이 가는 곳은 변방, 전쟁터였다. 이이제이(以夷制夷), 고구려인을 다른 이민족을 제압하는데 이용하겠다는 것이었다.

당나라의 강제이주가 시작되자, 현지에 살던 유민들은 오랫동안 살던 땅을 떠나 대량으로 탈주를 했다. 당에 끌려가기 보다 받아줄 곳으로 가겠다는 것이었다. 보장왕의 서자 안승(安勝)4,000여호를 이끌고 신라에 투항했다. 신라 문무왕은 안승을 보덕국왕에 봉하고 금마저(익산)에 머물도록 했다. 다른 유민들은 요나라로, 말갈족 지역으로 이동했다. 고구려 유민에게 요나라보다는 말갈족이 편했을 것이다. 한때 고구려에 편입되어 있었고 수·당의 침공에 함께 싸운 경험을 공유하기 때문이다.

 

당은 대규모 군사력으로 안동도호부 체제를 유지하려 했지만 성공하지 못했다. 구당서에 설인귀를 보내 군대를 주둔시켰는데 도주하여 흩어진 자가 많았다고 했다. 고구려 유민들의 저항에 당군에 탈주병이 생겨난 것이다. 언제부터인가 우리나라에서 오합지졸을 당나라 군대라고 불렀는데 한때 아시아 최강의 군대였던 당군도 고구려 유민들의 공격을 두려워 하며 벌벌 떤 듯 싶다.

안동도호부는 설치된지 불과 1년도 되지 못해 와해되기 시작했고, 670년엔 검모잠(劒牟岑)이 고구려 부흥운동을 일으켰으나 내분에다 당군의 토벌로 실패했다. 그러나 고구려인의 반란은 계속되었다. 당의 토벌대장 고간은 671년 안시성에서 유민을 제압하고 672년 백수산에서 고구려 반란군을 제압했다. 이때 신라가 병사를 보내 도았으나 당군이 물리쳐 2,000명을 죽였다고 한다. 673년에 저항하는 고구려 유민들을 쳐부수고 수천명을 사로잡았다. 나머지는 신라로 도망쳤다.

676, 당은 마침내 안동도호부를 요동으로 이동시켰다. 이듬해(677)에는 끌고 갔던 보장왕을 요동주도독으로 삼고 조선군왕으로 책봉했다. 왕을 하급직인 도독을 주고 통치범위도 42개주의 하나인 요동주에 한정되었다. 얼굴마담으로 이용하겠다는 술책이었다. 그런데 보장왕이 요동 땅에 오자 고구려 유민과 말갈족이 들썩였다.

당의 입장에선 혹을 떼려다 혹을 붙인 격이 되었다. 당나라는 급히 보장왕을 소환해 앙주(卬州)로 보내 버렸다. 그 이유는 배반, 즉 반란죄다. 자치통감에 高藏(보장왕)이 요동에 이르러 모반을 꾀해 몰래 말갈과 내통하였기 때문에 소환하여 卬州로 옮겨 그곳에서 죽게 했다고 쓰여 있다.

보장왕을 끌어내린 후에도 고구려 땅이 안정되지 않자 686년에 당은 보장왕의 손자 보원(寶元)을 조선군왕으로 앉혔다. 고구려 고토는 점차 무인지대가 되었다. 안동도호부는 공식적으로는 90년간 존속해 758년에 해체되지만, 이미 오래 전에 사실상 와해되어 있었다. 신당서에 따르면, 마지막 시기에 안동도호부의 관할은 14개 주, 1,582호였다. 초기 42개주, 70만호와 비교가 되지 않는다.

 

랴오닝성 차오양시 /위키피디아
랴오닝성 차오양시 /위키피디아

 

고구려 유민은 옛땅에서 죄다 흩어졌다. 당에 끌려가거나 신라로, 이민족의 땅으로 탈주했다.

이중 당나라에 끌려간 사람들은 영주(營州)에 일단 집결했다가 각지로 흩어졌다. 구당서 6695월조에 高麗28,200, 1,080, 3,300, 2,900, 낙타 60두를 이주시켰다. 장차 內地로 옮기기 위해 萊州營州 2주로 보낸 후 ·이남 및 山南··凉 以西 諸州空閑處에 나누어 安置하게 하였다고 했다. 고구려인과 약탈물자를 끌어다 영주와 래주에 집결시킨 후에 양쯔강, 회수 이남 또는 황하 상류 오르도스 지역으로 이동시켰다는 것이다. 끌려간 고구려 유민들은 변방으로 배치되었다. 변방에서 할 일은 그곳에서 농사를 짓다가 전쟁에 동원되는 일이었다. 고구려 유민들 중에 당에서 이름을 남긴 유민이 많았던 것은 변방에서 군사조작으로 활동했기 때문다. 그들은 처음부터 군사조직에 편제되어 활동했기 때문에 승전한 장수는 우대받을수 있었다.

고선지(高仙芝)도 그런 부류다. 구당서에 고선지는 본래 고려인이다. 아버지 고사계는 하서군에 복무하였고 시간이 지나 사진십장·제위장군이 되었다. 고선지는 젊어서 아버지를 따라 안서에 이르러 으로 유격장군이 되었다고 했다.

또다른 고구려인 왕모중(王毛仲)은 당현종의 재상이 되었다. 구당서에 왕모중 열전이 별도로 있다. 왕모중 열전에 이렇게 쓰여 있다. “왕모중은 고려인이었다. 모중은 이에 현종의 노복이 되었다. 모중은 성품이 영민했기에 현종이 임치왕(臨淄王)이었던 시절에 항상 옆에서 시중을 들었다.”

고선지와 왕모중은 망국의 설움을 딛고 상층부로 올라가기까지 온갖 설움과 고통을 이겨냈을 것이다.

 

고구려 유민들의 첫 번째 집결지는 영주였다. 영주(營州)는 지명 그대로 군사도시로, 현재 랴오닝성 차오양(遼寧省 朝陽)이다. 영주에는 고구려 유민 뿐 아니라 거란인, 말갈인도 있었다. 영주를 근거지로 한 고구려인으로 이정기(李正己)를 들수 있다. 그는 고구려가 멸망한지 80여년이 지난후, 안사의 난 초기에 영주 평로군(平盧軍)에서 그 모습을 드러내 산동(山東) 지역의 지배자가 되었다. 또다른 선택을 한 사람이 있다. 고국으로 돌아가 나라룰 되찾고 건국하는 일이었다. 영주에는 말갈족으로 고구려 장수였던 대조영(大祚榮)이 있었다.

 


<참고한 자료>

營州大祚榮 集團渤海國性格, 장병준, 동국대, 2007, 동북아역사재단

요동사, 김한규, 문학과지성사, 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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