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해②…말갈의 세계
발해②…말갈의 세계
  • 김현민 기자
  • 승인 2023.06.23 14: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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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 건국 때부터 대립과 속국관계…고구려 멸망후 만주 일대에 대변화

 

삼국사기에 말갈족이 자주 등장한다. 우리 역사에 3국이 정립했을 때 말갈은 만주 동부와 한반도 북동부에 실재했던 종족이다. 말갈은 때론 고구려, 백제, 신라와 부딪치고 때로는 복속했다. 고구려가 멸망한 후 빈자리를 대체한 종족이 말갈족이고, 그들이 세운 나라가 발해다. 발해를 우리 역사에 포함시킬지를 놓고 논란이 벌어지면서 국내 역사학계에 말갈족에 관한 많은 연구가 진행되었다.

 

말갈(靺鞨)은 진대에 숙신(肅愼), 한대에 의 읍루(挹婁), 북위대에 물길(勿吉)로 불리다가 수당대에 통칭하던 만주와 한반도 북부의 종족명이다. 반농·반수렵의 삼림민족으로, 숙신시대와 읍루 단계를 거치면서 여진족, 만주족의 원류가 되었다.

말갈이란 명칭이 중국 사서에 처음 나타난 것은 북제(北齊) 때인 563년이며, 중국 사서에서는 수서(隋書)에 처음으로 말갈전이 별도의 챕터(別傳)로 삽입되었다.

우리 사서에 말갈은 고구려 건국과 동시에 나타난다. 동명왕 원년에 그 땅(고구려)이 말갈 부락에 붙어 있어 침략과 도적질로 해를 입을까 걱정이 되었기에 마침내 그들을 물리치니, 말갈이 두려워 굴복하고 감히 침범하지 못하였다고 했다. (고구려본기 동명왕 원년)

말갈은 고구려가 멸망할 때까지도 단일 국가를 세우지 못하고 여러 부족으로 나눠져 있었다. ‘수서 말갈전에는 말갈 7부에 관한 기록이 실려 있다.

말갈은 고려(고구려)의 북쪽에 있다. 읍락에는 모두 추장이 있으나, 하나로 합해 지지는 않았고, 7종이 있다. 그 첫 번째는 속말부(粟末部)로 고구려와 서로 국경을 맞대고 있다. 승병(勝兵)은 수천이고 모두 용감하여 매번 고려를 노략질한다. 두 번째는 백돌부(伯咄部)로 속말의 북쪽에 있다. 승병은 7천이다. 세 번째는 안거골부(安車骨部)로 백돌의 동북쪽에 있다. 네 번째는 불열부(拂涅部)로 백돌의 동쪽에 있다. 다섯 번째는 호실부(號室部)로 불열의 동쪽에 있다. 여섯 번째는 흑수부(黑水部)로 안거골 서북쪽에 있다. 일곱 번째는 백산부(白山部)로 속말의 동남쪽에 있다. 승병은 모두 3천을 넘지 않으나, 흑수부가 더욱 강건하다. 불열부 동쪽에서는 화살에 모두 석촉을 사용하는데 옛 숙신씨(肅愼氏)이다.”

 

수나라 시대 동북아시아 지도(譚其驤, 1982) /박노석 논문 캡쳐
수나라 시대 동북아시아 지도(譚其驤, 1982) /박노석 논문 캡쳐

 

수서는 당 태종 10(636)에 장손무기(長孫無忌)와 위징(魏徵), 이연수(李延壽) 등이 태종의 명을 받아 편찬한 정사로, 고구려가 멸망하기 직전의 말갈족의 실태를 서술하고 있다. 그 무렵에 말갈족은 7개 부족으로 나눠져 있었고, 그 중 속말부가 고구려와 국경을 맞대고 대치관계에 있었음을 알수 있다. 고구려 정벌을 시도한 당 태종으로선 말갈족의 동태를 예의 관찰하고 있었던 것이다.

역사학계에서는 대체로 속말말갈이 쑹화강(松花江) 중류, 즉 지금의 지린성 눙안(農安)으로 보고, 백산부를 백두산 근처로 비정한다. 물론 다른 의견도 있다. 아래 지도는 중국 역사학자 담기량(譚其驤)이 수서 말갈전을 토대로 그린 수대의 지도(1982).

 

고구려가 존속하는 동안에 만주에서 고구려가 주류였고, 말갈은 제2의 종족이었다. 고구려와 말갈은 수백년 오랜 세월 동안에 대립과 복속의 관계를 반복해 왔다.

고구려 태조대왕 69(121)숙신(肅愼)의 사신이 와서 자주색 여우 가죽 옷과 흰 매와 흰 말을 바쳤다. 임금이 연회를 베풀어 노고를 위로하고 돌려보냈다고 했다.

그러다가 서천왕 11(280)엔 고구려가 숙신을 정벌한다. “11년 겨울 10, 숙신이 침입해 와서 변방 백성들을 죽였다. 임금은 이에 달가(達賈)를 보내 숙신을 정벌하게 하였다. 달가가 기이한 계략으로 적을 엄습하여 단로성(檀盧城)을 빼앗고 추장을 죽였으며, 주민 6백여 가()를 부여 남쪽 오천(烏川)으로 옮기고, 항복한 부락 6~7곳은 종속국으로 삼았다. 임금이 크게 기뻐하여 달가를 안국군(安國君)으로 삼고, 서울과 지방의 군사에 관한 일을 맡아보게 하였으며, 겸하여 양맥ㆍ숙신 등의 여러 부락을 통괄하게 하였다.” (고구려본기 서천왕조)

3세기 후반부터 말갈이 고구려에 복속한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말갈은 별도로 중국에 조공을 했다. 중국 사서에 말갈이 475년부터 572년까지 약 1세기 동안 25회의 조공을 한 사실이 기록되어 있다.(김영천) 말갈 또는 물길이라는 이름의 조공사절단은 하나의 나라를 이루지는 못했지만 개별 부족 단위로 북조에 조공을 함으로써 고구려와 별도의 정치체제가 존재함을 드러냈다.

수나라가 남북조를 통합하고 돌궐을 공격하자 고구려가 그 틈을 비집고 속말말갈이 차지하던 눙안 지역을 회복했다. 이에 속말말갈에 내부 균열이 일어나면서 고구려에 다시 복속하게 되었다는 분석이다. (김흥복)

 

장수왕 이후 고구려는 말갈의 병력을 동원한다.

임금이 말갈의 병사 1만을 거느리고, 신라의 실직주성(悉直州城)을 공격하여 빼앗았다.” (장수왕 56)

임금이 장수 고로(高老)를 파견하여 말갈과 함께 백제의 한성(漢城)을 공격하려는 계획을 세우고, 횡악(橫岳) 아래에 주둔하게 하였다.” (문자명 16)

수당이 고구려를 정벌할 때 고구려와 말갈의 동맹관계에 있었기에 수당의 대군을 격퇴할수 있었다. 668년 고구려를 침공한 당군은, 평양성 공격을 앞두고 부여성 일대를 먼저 공략했다. 말갈족을 고구려와 분리하려는 것이었다. 천개소문의 아들 천남건도 도성이 포위된 절체절명의 상황에서도 5만의 병력을 빼내 부여성 탈환을 시도했다. 이 전투에서 고구려군 3만이 사망했다. 당은 고구려와 말갈의 공동전선을 차단한 상태에서 평양성을 공격해 고구려를 멸망시킬수 있었다. (보장왕 27)

 

고구려가 멸망한 이후 말갈이 돌궐과 중국으로 흩어졌다는 기록이 중국 사서에 나온다. 구당서 말갈전에 이렇게 적혀 있다.

말갈은 동으로는 바다에 이르고 서로는 돌궐에 접하며 남으로는 고구려와 경계를 삼고 북으로는 실위(室韋)에 이어진다. 그 나라는 무릇 수십부로 이루어졌고,각기 추수가 있으며 혹은 고구려에 부용하고,혹은 돌궐에 신속한다. 백산부는 본디 고구려에 부용되어 있었는데, 평양을 점령한 뒤에 부의 무리들이 많이 중국에 들어왔다. 골돌[백돌부], 안거골, 호실 등 부도 역시 고려가 점령된 뒤에 분산되어 미약해져 뒤에 들리는 바가 없다.”

 

말갈 7부의 상대적 위치 /박노석 논문 캡쳐
말갈 7부의 상대적 위치 /박노석 논문 캡쳐

 

연구자들은 말갈 7부족 가운데 속말말갈이 고구려와 가장 밀접한 관계에 있었다는데 공감대를 형성한다. 고구려와 인접한데다 일찍부터 교류를 가졌기 때문이다. 고구려는 일찍부터 속말말갈을 속지화하면서 돌지계(突地稽)와 같은 저항 부족을 축출하고 보다 공순한 부족들과 교류를 함으로써 간접지배의 방식을 취한 것으로 보인다. 백산말갈도 친고구려 부족으로 파악된다.

고구려는 말갈 수장들에게 세력에 맞게 고구려의 벼슬을 수여하고, 큰 부락을 중심으로 고구려의 관리를 파견해 촌락의 안전을 보장해주고 통제하는 지배방식을 구사한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오랫동안 고구려의 수당 전쟁에 참여하는 바람에 말갈족 지배층이 큰 피해를 입었다. 게다가 말갈을 지배, 통치하던 고구려라는 권력기반이 사라지게 되었다. 고구려 멸망시 속말말갈의 추장은 대조영(大祚榮)이었다. 그는 당군에 의해 영주(營州)에 포로로 잡혀 있었다.

 


<참고한 자료>

6세기 말 7세기 초 고구려와 말갈의 관계, 박노석, 전북대, 2011

高句麗靺鞨 關係硏究, 김흥복, 한국교원대, 2006

靺鞨成長高句麗靺鞨 服屬, 김영천, 고려대,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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