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해③…속말말갈 추장 대조영
발해③…속말말갈 추장 대조영
  • 김현민 기자
  • 승인 2023.07.09 14: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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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란족 이진충의 반란에 동조…당군 공격에 만주지역으로 이동해 건국

 

발해가 우리 역사에 포함되는지 논란에 가장 관심을 끄는 대목은 건국자이자 초대 군주인 대조영(大祚榮)이 어느 종족에 속해 있는지 여부일 것이다.

조선시대 실학자 유득공은 발해고’(渤海考) 첫머리에 진국공은 성이 대()씨이고 이름은 걸걸중상(乞乞仲象)으로, 속말말갈인이었다. 속말말갈은 고구려에 신하가 되었던 자들이다.”고 썼다. 대조영의 아버지 대걸걸중상에 대한 서술이다. 유득공은 정조 때 북학파의 한사람으로 발해의 역사적 중요성을 강조하며 발해를 연구했고, 발해의 옛땅을 회복해야 한다는 생각을 피력했다. 그런 생각을 가진 실학자도 대조영이 속말말갈인임을 인정했다.

중국 사서인 구당서에는 대조영은 본래 고려별종(高麗別種)이었다고 적혀 있다. 고려별종은 고구려의 주류인 예맥족이 아니라 숙신계 말갈인임을 의미한다.

 

발해를 우리역사의 범주로 끌어들인 것은 조선후기 유득공이었다. 중국은 동복공정을 진행하면서 발해를 중국의 지방정권으로 규정했다. 그 기준은 말갈족이 고구려에 편입해 있었는지 여부다. 우리 역사학자들은 말갈족이 고구려에 복속했다고 주장하는 반면에 중국인들은 말갈족은 고구려와 별도로 독자적인 세력을 형성했다고 본다.

두 나라의 역사관 차이는 지도에서도 나타난다. 위키피디아 한국어판과 중국어판에서 고구려 전성기 강역의 그림이 서로 다르게 그려져 있다. 한국어판에는 고구려의 영토가 북쪽과 동쪽으로 크게 그려져 있는데 비해 중국어판에서는 동부지역의 절반을 갈라 물길국(勿吉國)으로 표시해 놓았다. 물길은 삼국시대에 말갈(靺鞨)족으로 알려진 종족으로, 후에 여진족, 만주족으로 개칭해 금()과 청()을 세우게 된다. 중국 사학자들은 말갈족을 자기네 소수민족으로 파악해 고구려와 분리한 것이다. 고구려 지도의 차이는 두 나라 역사관의 차이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발해가 고구려의 계승국이었는지를 확인하려면 고구려의 정체성을 이해해야 한다. 고구려는 다민종국가였고, 부족연합체였다. 고구려의 주류는 예맥계였고, 숙신계 말갈족은 구당서에서 서술하듯 별종이었다. 고구려가 멸망하고 발해가 건국하는 과정에서 만주의 주류가 예맥계에서 숙신계로 넘어갔다. 발해가 고구려를 계승하면서 주류 종족이 교체된 것으로 이해해야 한다.

대조영은 말갈인으로 고구려 장수였다. 그렇기에 그가 건국한 발해는 우리 역사에 들어와 있다. 대한민국 해군은 2005년에 세 번째 방공구축함으로 대조영함을 실전배치했고, 국영방송 KBS2006년애 대하드라마 대조영을 방영했다.

 

위키백과 한국판(왼쪽)과 중국판(오른쪽)이 각각 달리 그린 고구려 전성기의 강역 /위키피디아
위키백과 한국판(왼쪽)과 중국판(오른쪽)이 각각 달리 그린 고구려 전성기의 강역 /위키피디아

 

대조영의 뿌리인 속말말갈(粟末靺鞨)은 어디인가. 중국 사서에 속말수(速末水)라는 표현이 있다. 속말수는 쑹화강(松花江)의 지류다. 쑹화강은 백두산 천지에서 발원해 북쪽으로 흐르다가 동쪽 방향으로 흐른다. 이중 북쪽으로 흐르는 상류를 속말수라 부른다. 속말말갈은 속말수 주변에 거주하던 말갈족을 말하는데, 지금의 지린(吉林)시 일대다.

지리적으로 말갈은 고구려에 의해 중국과 차단되어 있었다. 중국의 수·당이 고구려를 복속시키려면 말갈의 손을 잡아야 했고, 고구려는 말갈을 제압, 후방을 안정시켜야 중국과 대결할수 있었다. 말갈은 이해관계에 따라 중국에 붙기도 하고 고구려에 붙기도 했다. 속말말갈의 추장 돌지계(突地稽)는 수나라로 건너갔고 그의 아들 이근행(李謹行)는 당군을 위해 봉사했다. 그에 비해 속말말갈의 추장 대조영과 걸사비우는 고구려에 들어가 당나라에 저항했다.

대조영이 역사에 등장하는 첫 장면은 영주(營州). 구당서엔 “(대조영이) 고구려가 멸망한 후 가속(家屬)을 거느리고 영주로 사거(徙居)하였다고 했다. 여기서 가속은 가족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그를 따르는 부족집단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대조영이 본거지인 지린에서 1,000km나 떨어진 영주로 이주를 했을까. 영주는 현재 랴오닝성 차오양(遼寧省 朝陽)으로, 당나라 시대엔 동북지역 이민족을 통제하는 전진기지였다. 영내에는 당나라에 투항하거나 지배를 당해 강제이주된 거란족, 해족, 말갈족, 고구려인들이 살고 있었다. 대조영과 그 부족이 고구려가 멸망한 후 당에 의해 강제로 이 먼 곳으로 끌려간 것으로 보아야 한다. 그들의 생활은 불안했다. 그곳에 잠시 머물다 서역 또는 중국 남부 어딘가 변방지대에 끌려가 농사를 짓다가 전선에 투입될 것이었다.

 

KBS 드라마 ‘대조영’ 포스터
KBS 드라마 ‘대조영’ 포스터

 

영주에서 대조영은 추장이었다. 최치원은 고운집(孤雲集)발해의 원류는 고구려가 망하기 전에는 본시 사마귀만한 부락이었습니다. 그 중에 속말(粟末)의 작은 마을(小蕃)이 일찍이 고구려를 따라 중국 안으로 이사(內徙)하더니, 그 수령 걸사비우와 대조영 등이 측천무후 때에 이르러 영주에서 죄를 짓고 도망하여 황구(荒丘)를 점거한후 진국(振國)이라 일컬었습니다.”고 했다. 당대 신라인은 대조영이 말갈의 추장임을 확인했다.

대조영이 거느린 집단은 당의 지배를 받는 기미부주(羈縻府州)의 하나였다. 대조영이 객지인 영주를 탈출해 고향으로 돌아온 계기는 거란족이 만들어 주었다.

같은 시기에 영주에 끌려간 거란족 수령 이진충(李盡忠)6955월에 당의 숙적인 돌궐의 지원을 받아 봉기를 일으켜 영주성을 함락했다. 이진충은 스스로 무상가한(無上可汗)이라 부르며 처남 손만영(孫萬榮)을 선봉으로 삼아 당을 공격했다. 이진충의 반란은 도독인 조문홰(趙文翽)의 폭정을 견디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진충의 반란에 영주에 끌려온 말갈인들이 합세했다. ᄆᆞᆯ갈이 당의 폭정에 시달린 것은 거란족과 마찬가지였고, 동북 이민족의 연대감이 형성되었다. 최치원이 대조영 등이 영주에서 죄를 짓고 도망했다는 것은 이진충의 반란에 동조했음을 의미한다.

측전무후는 기미주를 대거 장성 이남으로 옮기고, 군대를 모아 반격에 나섰다. 당의 대대적인 반격에 그해 9월 이진충은 사망했다.

이때 고구려 유민의 모두가 이진충의 반란에 동조하지는 않았다. 국사편찬위원회가 운영하는 우리역사넷에 따르면, 고구려 유민이었던 이정기(李正己) 집안은 이탈해 당군에 호응했고, 대조영 집단과 말갈족의 걸사비우(乞四比羽) 집단은 동쪽으로 이주(東走)를 택했다.

이진충이 죽은후 그의 처남 손만영이 거란족 전열을 재정비하고 남하했다. 이에 당나라는 만주로 돌아간 대조영과 걸사비우 집단에게 회유책을 제시했다. 당은 대조영의 아버지 걸걸중상에게 진국공(震國公), 걸사비우에게는 허국공(許國公)의 작위를 주면서, 당 체제 안으로 끌어들이려 했다. 이는 중국 전통적인 이이제이(以夷制夷)의 전형이고, 분열정책(devide and rule)의 일환이었다.

내부에서 격렬한 토론이 이뤄졌을 것이다. 대세는 강경론이었다. 대조영과 걸사비우 집단은 당의 제의를 거부했다. 그들은 고향에서 나라를 세우기로 마음을 먹었다. 측전무후는 이진충의 양자로 항복한 거란장수 이해고(李楷固) 앞세우고 동족인 돌지계의 아들 이근행을 붙여 토벌군을 조직해 공격을 명령했다.

이 무렵 걸걸중상이 병사하고 대조영이 수장이 되었다. 또다른 수장 걸사비우는 당군의 공격에 맞서 먼저 교전을 벌였으나 패배하여 전사하였다. 대조영은 당군의 공격을 피해 더 동쪽으로 이동했다. 걸사비우 집단이 대조영 집단에 합류했다.

대조영 집단은 천문령(天門嶺)을 넘었다. 천문령은 오늘날 랴오닝성과 지린성의 경계에 있는 합달령(哈達嶺)으로 비정된다. 이해고가 천문령을 넘어 바짝 추격해 오자 대조영은 무리를 규합해 결전을 준비했다. 드디어 천문령 동쪽에서 치열한 전투가 벌어져 대조영이 이해고 군대를 대파했다. 이해고는 겨우 몸만 빠져 달아났다. 이로써 대조영은 건국 과정에서 마주친 최대의 위기를 벗어났다.

이해고가 물러간 후 거란과 해가 돌궐에 복속했다. 당과 대조영 집단 사이에 차단막이 형성되고, 대조영에 대한 당의 공격이 불가능해졌다. 대조영은 더 동쪽으로 이동해 동모산에 도읍을 정하고 나라를 세웠다. 나라 이름은 당이 아버지에게 준 진국(震國 또는 振國)이라고 했다. 당에 반기를 들었지만 화해의 여지를 열어 놓은 것이다. 서기 698년, 고구려가 멸망한지 30년만에 새로운 나라가 건국되었다.

 

2006년 미국 샌디에이고 해군기지에 입항 중인 DDH-977 대조영함 /위키피디아
2006년 미국 샌디에이고 해군기지에 입항 중인 DDH-977 대조영함 /위키피디아

 


<참고자료>

營州大祚榮 集團渤海國性格, 정병준, 동국대, 2007

발해를 다시 본다, 송기호, 주류성출판사, 2008

발해고, 유득공(송기호 옮김), 홍익출판사, 2000

우리역사넷, 대조영집단의 동주와 건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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