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고 연방, 재정적자 메우려 발악적 통화팽창
유고 연방, 재정적자 메우려 발악적 통화팽창
  • 김현민 기자
  • 승인 2021.01.21 15: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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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 인플레⑩…내전과 유엔제재로 물자 부족, 지폐 인쇄 남발

 

19923월부터 19941월까지 22개월동안 유고슬라비아 연방공화국에 무려 116%(1.16×1015)라는 천문학적 인플레이션이 발생했다. 1920년대 독일의 하이퍼인플레이션보다 심각했다. 유고연방의 인플레이션은 1946년의 헝가리, 2008년의 짐바브웨와 함께 세계 3대 하이퍼인플레이션으로 꼽힌다.

당시 유고연방공화국은 지금의 세르비아와 코소보, 몬테네그로를 합친 나라였다. 1990년대 들어 유고슬라비아 사회주의 연방(Socialist Federal Republic of Yugoslavia)이 해체되어 민족별로 독립국가를 형성했다. 세르비아는 몬테네그로를 합쳐 유고슬라비아 연방공화국을 구성했다. 세르비아의 슬라브주의자 슬로보단 밀로셰비치(Slobodan Milošević)가 집권하면서 각 민족의 독립을 저지하기 위해 전쟁을 일으켰다. 인종청소가 진행되고, 대량의 살육이 전개되었다. 유엔과 EU는 유고슬라비아 연방에 경제제재를 가해 밀로셰비치 정권을 압박했다.

 

유고슬라비아 연방 /위키피디아
유고슬라비아 연방 /위키피디아

 

유고슬라비아는 요시프 브로즈 티토(Josip Broz Tito)가 통치하던 옛 연방 시절부터 돈을 찍어 재정적자를 메우는 방식을 써 왔다. 1980년 티토가 죽기 전까지 공산정권은 연간 15~25%의 인플레이션을 유발했다.

밀로셰비치가 쪼그라든 연방을 이끌 때에 전쟁과 내전의 악순환이 반복되었고, 유엔과 서방의 제재로 무역이 금지되고 극심한 물자부족에 시달렸다. 밀로셰비치 정권은 막대한 전쟁비용과 그에 따른 재정적자를 보충하기 위해 앞서 티토 정권이 하던 수법을 도입했다. 중앙은행을 통해 통화량을 늘린 것이다.

19924월 세르비아와 몬테네그로가 연방을 구성한후 연방은 곧바로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와 전쟁을 선포했다. 유엔의 제재 결의가 나왔고, 유고 연방에 대한 금수조치(엠바고)가 취해졌다.

초기에 밀로셰비치 정권이 한 일은 국민들의 경화(硬貨, hard currency)를 약탈하는 것이었다. 개인들이 은행에 저축한 독일 마르크화를 정부가 빼앗아 급한 용처에 돌려막았다. 국민들은 은행에 접근하지 못하도록 했다. 경화를 다 써버린 후에 돈을 무제한 찍어냈다.

이전까지 최고가 지폐의 액면가는 5만 디나르(dinar)였다. 1992년에 5억 디나르 지폐를 찍어냈고, 이듬해엔 100억 디나르 지폐를 발행했다. 물가는 하루가 다르게 변했다. 1992~1994년 사이 22개월 동안 하루 평균 인플레이션은 62%였고, 한시간 평균 인플레이션이 2.03%였다는 계산이 나온다. 이 기간에 실업률은 30%에 달했다.

 

슬로보단 밀로셰비치 /위키피디아
슬로보단 밀로셰비치 /위키피디아

 

정부가 가격 통제에 나섰다. 정부가 운영하는 상점에 낮은 가격을 고시하도록 강제했다. 하지만 국영상점에는 물건이 텅 비었다. 아무도 낮은 가격에 납품하지 않으려 한 것이다. 대신에 암시장이 형성되었다. 그곳에서는 정부가 고시한 가격보다 높은 값으로 상품이 거래되었다.

주유소의 기름값도 통제되었다. 전국 주유소는 정부 고시가격으로 기름을 팔도록 했는데, 주유소들이 고시가격으로 팔면 손해를 보기 때문에 문을 닫았다. 이에 비해 주차장이나 길거리에는 기름통을 운반해와 파는 시장이 형성되었다. 그곳에서 기름을 구할수 있었다. 자유시장의 기름 가격은 현지통화 디나르가 아니라 독일 마르크로 표시되었다.

기름 값이 폭등하면서 운전자들은 자가용을 포기하고 대중교통수단을 활용했다. 하지만 국영버스회사도 운영자금이 모자라 버스 운행을 줄였다. 수도 베오그라드의 경우 1,200대의 버스가 있었는데, 이중 500대 이하만 운행되었다. 출퇴근 시간엔 버스가 승객들로 미어터져 요금징수를 포기해야 했다.

정부가 돈을 찍어 냈지만 공공시설을 운영할 돈이 모자랐다. 도로에 구멍이 나도 방치되었고, 공공건물의 엘리베이터는 섰다. 앰뷸런스와 소방차, 청소차에는 기름이 부족했다. 기름이 부족하게 되자 정부는 농업용 기름 공급을 중단했다. 농업생산이 줄고 식량 부족의 악순환이 이어졌다.

정부가 가격을 엄격하게 통제하자, 제빵업자가 빵 공급을 중단했고, 도축장이 육류 공급을 기피했다. 정부가 운영하는 상점에는 빵과 육류를 구하지 못했고, 먹거리는 암시장에서 유통되었다. 하루가 다르게 가격이 상승하면서 유고 통화는 상거래에서 인정을 받지 못했다.

 

유고슬라비아의 5,000억 디나르 지폐 /위키피디아
유고슬라비아의 5,000억 디나르 지폐 /위키피디아

 

그런데도 디나르로 표시되고 지급되는 곳이 있었다. 정부가 운영하는 우체국과 연금지급이었다. 연금을 타러 긴 줄이 늘어섰다. 돈이 모자라 뒤에 사람은 타지 못했다. 내일 타면 그만큼 연금으로 받은 돈의 구매력은 줄어든다. 어느 곳에선 연금을 타러 사람들이 긴 줄을 형성했는데, 운 좋은 사람이 야채와 육류를 실은 카트를 끌고 가다가 봉변을 당한 적도 있다. 전화요금은 납부를 미루는 게 상책이었다. 어떤 이는 국제전화를 길게 해 엄청난 요금이 나왔는데, 한달 후에 지불했더니 몇푼밖에 되지 않았다고 한다.

 

이런 상황에도 밀로셰비치 정권은 돈을 계속 찍어 냈다. 조폐창의 인쇄 능력이 한계에 이르자 통화 단위를 바꾸는 화폐개혁을 단행했다. 1990년에 1만 디나르를 1디나르의 새 지폐로 교환하는 조치를 취했다. 0을 네 개나 지웠다. 5만 디나르가 최고권이었다. 1993년에는 새 디나르도 100억 디나르 짜리를 발행한데 이어, 그해 말에는 5,000억 디나르 지폐를 내놓았다. 1994년에는 또다시 10:1의 새 디나르를 발행했다. 한달후엔 독일 마르크와 등가로 노비 디나르(novi dinar)를 내놓았는데, 1 노비 디나르는 1,000만 디나르였다. 1990년을 기준으로 4년후인 19941월의 인플레이션은 015개 붙인(1015) 숫자로 진행되었다.

 

소녀를 모델로 한 유고슬라비아 지폐 /위키피디아
소녀를 모델로 한 유고슬라비아 지폐 /위키피디아

 

최고점에 달한 19941월의 인플레이션은 3.13×109%였다. 인플레이션이 극에 달했을 때, 유고연방의 중앙은행은 유명인사의 얼굴을 지폐에 도안하지 않았다. 다음날 돈 값이 폭락하면 그 인물의 가치도 폭락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에다. 막판에는 누구인지도 모르는 평범한 소녀의 얼굴을 도안으로 사용했다.

 

19941월 유고연방은 세계은행(World Bank) 이코노미스트 출신의 드라고슬라브 아브라모비치(Dragoslav Avramović)를 초빙해 경제개혁을 단행했다. 그의 방법은 심플했다. 새 디나르를 발행하고, 그 통화가치를 독일 마르크에 고정시켰다. 그리고 더 이상 새 돈을 찍어 내지 않았다. 몇 개월후 인플레이션은 잡혔고, 물자부족은 사라졌다. 인플레이션 억제에 성공한 후 그는 중앙은행 총재를 맡았다.

아브라모비치의 성공은 그동안 유고의 인플레이션이 유엔 제재 때문이 아님을 입증했다. 정부가 무분별하게 돈을 찍어냈고, 인플레이션 심리가 만연하면서 시장의 왜곡이 생겼던 것이다.

하지만 1996년 아브라모비치가 물러나고 코소보 위기가 격화되면서 1999년에 디나르의 가치가 마르크에 대해 30분의1로 떨어졌다.

유고의 하이퍼인플레이션이 종식된 것은 2000년 밀로셰비치 정권이 타도되고 내전이 종식된 후였다. 하이퍼인플레이션은 밀로셰비치가 유발한 것이고, 그 해답은 정권교체였다.

 


<참고자료>

San Jose State University, Episodes of Hyperinflation

Milica Stojković, Hyperinflation in Yugoslavia: An Example in Monetary History

Wikipedia, Hyperinflation in Yugoslavia

Wikipedia, Hyperinflation

Wikipedia, Sanctions against Yugoslav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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