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플레이션⑧…대원군의 실패한 통화팽창 조치
인플레이션⑧…대원군의 실패한 통화팽창 조치
  • 김현민 기자
  • 승인 2021.01.11 14: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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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백전 발행 이어 청전 수입…생산력 정체 상태에 물가 상승만 초래

 

1863년 고종이 즉위하면서 대원군의 집권이 시작된다.

대원군이 정권을 잡았을 때 조선의 재정은 취약했다. 재정을 늘리려면 세수를 확대해야 한다. 조선은 농업국가였다. 세수를 확대하려면 토지의 세율을 올리거나 면세지를 줄여야 했다. 집권 직전인 1862년에 경상도 경상도 진주(晉州단성(丹城) 등지에서 민란이 37회나 발생해 관리들의 세금횡포와 양반 지주층의 부정부패에 저항했다. 세금을 올리는 방법은 민중의 저항을 유발하므로 대원군은 고려조차 하지 않았고, 대신에 세금을 내지 않은 땅을 줄이는 길을 선택했다. 그러나 세금을 내지 않은 땅은 왕족과 사대부, 관청 등 지배계급이 갖고 있던 땅이었다. 그는 왕권 강화라는 명분을 앞세워 지배층과 세금전쟁을 벌이게 된다.

 

흥선대원군 초상화 /문화재청
흥선대원군 초상화 /문화재청

 

대원군의 세수확충 계획은 세원을 늘리기 위한 양전(量田)과 면세지(免稅地) 축소 두 가지였다.

양전은 집권 초기인 고종 12월에 시작되었다. 대원군은 우선 세금을 내지 않은 숨은 토지(隱結)을 찾아내 세금을 물리는 정책을 추진했다. 영의정(領議政) 김좌근(金左根)의 건의로 실시된 이 정책은 전국적으로 동시에 실시하는 무리인 만큼 2-3년에 걸쳐서 몇 고 을씩 돌아가면서 실시했다. 1)

양전 정책은 제대로 시행되지 않았던 것 같다. 양반계층이 숨겨 놓은 땅을 양안(量案)에 올리길 꺼려 한 것이다. 고종은 양전이 제대로 시행되지 않은 것에 불만을 표시하고 암행어사를 파견해 실태를 보고하게 했다.

대원군 집권기에 세금을 내는 전결(田結)은 집권 직전인 철종 14763,984결에서 고종 1081601결로 집권 10년 사이에 5만결 가량 늘어났다. 대원군이 사대부와 싸운 결과로 늘린 세수원이 6.1%에 불과했던 것이다.

같은 시기에 세금을 면제받는 토지는 70221결에서 693,296결로 1% 감소하는데 그쳤다. 전국 토지의 절반에 가까운 토지가 이런 저런 이유로 세금을 물리지 않는 면세지였다. 재해로 인한 면세지는 철종 14년에 46,758결에서 고종 10년에 15,624결로 3만결 이상 줄었다. 이에 비해 왕족과 사대부가 보유한 기타 면세지는 이 기간에 653,463결에서 677,672결로 오히려 늘었다. 2)

이 조사에서 보듯, 대원군의 세원확대정책은 재해가 났을 때 면제해주는 세금을 박하게 매겨 세금을 물렸을 뿐, 왕족과 사대부들의 면세토지가 늘어나 실패로 끝났다.

대원군이 서원철폐를 통해 밀어붙인 서원전의 세수화는 그 규모가 상대적으로 크지 않았다.

 

대원군의 세수정책은 토지제도의 근본적 개혁이 없이 진행되었기 때문에 세수 증대에 기여한바가 미미했고, 오히려 사대부들의 반발을 증폭시키는 역효과를 냈다.

조선시대 중요한 세원이었던 토지에서 세수확보가 실패했기 때문에 대원군은 자신의 웅대한 계획을 실현하기 위해 무모한 정책을 취한다. 그것은 당백전(當百錢)의 발행이다.

당백전은 고종 3(1866) 대원군의 측근인 좌의정 김병학金炳學)의 건의로 시작한다. 김병학은 대원군이 추진하는 경복궁 증축사업을 이유로 들었다.

김병학이 아뢰기를, “백성들의 생활은 어렵고 재정은 다 떨어졌는데 건축 공사를 크게 벌이고 있으므로 공사(公私) 간에 일을 더는 지탱해 나갈 수 없게 되었습니다. …… 옛적에 당십전(當十錢)이나 당오전(當五錢)을 쪼개어 당이전(當二錢)이나 당삼전(當三錢)으로 만들어 쓴 법은 모두 일시적으로 임시변통한 정사였습니다. 지금 나라의 재정이 몹시 고갈된 때에 …… 당백대전(當百大錢)을 주조하여, 널리 쓰이고 있는 통보(通寶)와 함께 사용한다면 재정을 늘리는 데 조금이나마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고 했다. 3)

일주일후에 당백전 발행을 놓고 어전회의가 열렸다. 판중추부사 조두순(趙斗淳)은 반대의견을 밝혔다.

조두순이 아뢰기를, “무게나 크기를 갑자기 바꿀 때에 백성들이 혹 불편하게 여기거나 불신하는 것이 폐단입니다. 의심하여 통용이 막히면 그칠 수 없으니, 우선 시험 삼아 당십전(當十錢)으로 그 유통을 살펴보아야 하니 먼저 가벼운 것으로 그 무거운 것을 징험해 보아야 합니다. 당십전이나 당백전이나를 막론하고 만드는 노력은 적게 들면서 얻는 이득은 매우 크기 때문에 놀고먹는 자들이 도주(盜鑄)한다면 장차 하루 동안에 몇 곱절의 이득을 얻으므로 성상의 재처(哉處)만 바랍니다.’고 했다.

조두순은 폐단을 우려했지만, 우려의 대상은 인플레이션이 아니라, 화폐위조의 가능성이었다.

우의정 유후조(柳厚祚)는 당백전 발행을 찬성했고, 고종은 대원군의 뜻에 따라 발행을 윤허했다. 당백전 주조는 호조가 주관하고 장소는 금위영(禁衛營)에서 했다. 4)

 

당백전 앞과 뒤 /화폐박물관
당백전 앞과 뒤 /화폐박물관

 

마침내 한달뒤인 186612월부터 당백전이 유통되기 시작했다. 당백전은 기존 통화인 상평통보(常平通寶)와 함께 법정화폐(legal tender)로 유통되었다. 조선조정은 당백전의 사용을 활성화하기 위해 세금을 납부할 때 당백전을 3분의2, 상평통보를 3분의1 비율로 납부토록 했다. 또 군용물자 구매와 환곡(還穀) 마련에 당백전을 사용토록 했다.

 

당백전 발행의 주요 이유는 재정 확보였다. 돈을 찍어내는 것은 가장 손쉬운 재정확보 방법이다.

또다른 이유는 구리 값의 상승이다. 조선 후기에 구리값이 올라 주화 제조원가가 급상승했다.

안의순에 따르면 송평통보를 주조할 때의 수익성은 영조 750%에서, 영조 51년에 30%, 정조 2220%, 순조 1410%로 낮아졌다. 정부가 동전을 주조해서 얻는 이익이 갈수록 떨어지자, 조정은 상평통보 1()의 무게를 영조 182전에서 1817푼으로 낮췄다. 5)

일종의 평가절하(debasement)를 단행한 것이다. 그후 영조 33년에 12푼으로 낮췄다. 따라서 같은 구리로 가격을 올리는 방안이 논의되고 있었다. 조두순의 말대로 당십전을 만들었으면, 나름 충격이 적었을수도 있다.

 

당백전은 상평통보의 가치를 100배 증대시킨 신화폐였다. 그레샴의 법칙에 따라 악화인 당백전이 상평통보를 구축했다. 상평통보가 시장에서 자취를 감추었다.

당백전은 6개월 동안 1,600만냥이 주조된 것으로 추정된다. 이는 1816~186348년 동안 공급된 상평통보 총량의 3배에 해당했다. 당백전은 금속가치의 16-20배에 이르렀다. 하지만 당백전은 상평통보의 100배의 효과를 가져오지 못하고 5~6배의 가치로 거래되었다.

실물 생산은 늘지 않고 화폐공급만 증가할 때 인플레이션은 필연적으로 나타난다. 186612월에 1석에 7-8냥 하던 쌀값이 2년 후에는 44-45냥으로 6배 올랐다. 월간 인플레이션율이 7.3~7.5%에 달한 셈이다. 이는 1678년부터 1866년까지 188년 동안 쌀값이 2배 오른 것과 비교하면 실로 엄청난 물가상승이었다. 6)

농민들은 물가 상승을 인지고선 쌀을 팔려고 하지 않았다.

 

경복궁 근정전 /문화재청
경복궁 근정전 /문화재청

 

시중에 당백전 사용을 기피하자, 대원군은 고종을 앞세워 당백전의 유통을 강요했다. 위조화폐 주조범을 참수하겠다고 위협하고, 상평통보를 비축한 상인들에게 유통을 강요했다. 또 경복궁 증축에 기부하는 원납전(願納錢)은 당백전으로 내도록 강제했다.

결국 대원군은 6개월만에 당백전 통용을 폐지한다. 1867(고종 4)에 당백전 발행이 중단되고 10월에 유통이 금지되었다.

 

당백전 주조와 유통이 금지되었지만, 또다른 문제가 생겼다. 화폐 유통량이 급감한 것이다. 대원군은 청나라 동전(淸錢)을 수입해 썼다.

조선왕조실록에는 이렇게 쓰여 있다. 7)

의정부(議政府)에서 아뢰기를, "당백전은 이미 주조하는 것을 그만두었습니다. 새 돈과 옛날 돈이 서로 뒤섞여서 현재 유통되고 있는데, 시장에 쌓여 있는 소전(小錢)이 원래 매우 많다고 합니다. 비록 어떤 연고로 해서 흘러나왔는지 알 수 없습니다만 법으로 막고 있는 바 단지 녹여서 그릇을 만드는 재료로 쓰게 된다면 도리어 말이 되지 않을 것입니다. 이제 함께 통용시킨다면 공사 간에 거래할 때 또한 힘을 펴게 되는 방도가 있을 것이니, 이러한 뜻을 중앙과 지방에 알려주어 편의에 따라서 통용하게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윤허했다. 6)

정부에서 허용하기 전에 청나라 동전(小錢)이 이미 유통되었던 것이다. 그런데 조선 조정은 청전과 상평통보의 액면가를 동일하게 통용하도록 허용했다. 당시 금속가치로 청전은 조선 동전의 절반에 불과하고, 가치로는 조선 동전의 3분의1이었다.

값싼 청전이 상평통보를 밀어내기 시작했다. 중국에서 청전을 사면 조선에서 사는 것보다 3분의1에 불과했기 때문에 일부 상인들은 청나라에서 청전을 사와 유통시키면서 환차익을 얻었다고 한다.

당시 남아 있는 상평통보는 1,000만냥이었는데, 유통된 청전은 300~400만냥이었다. 값싼 돈이 시장에 대거 밀려들어오면서 물가를 상승시키는 부작용을 초래했다.

1873(고종 10) 장령 홍시형(洪時衡)은 상소에서 이렇게 상주했다. 8)

천전의 폐해는 당백전보다 심합니다. 물가는 몇 곱절 뛰어오르고 여러 차례 풍년이 들던 기상이 날로 점점 스산해져 갑니다. 영남(嶺南)과 서북에서 의심을 사고 사용하지 않으며 원망이 대단합니다. 부디 청전을 혁파하고 우리나라 돈을 씀으로써 물가를 고정시키고 인심을 진정시키소서.”

대원군은 재정확보도 실패하고 노론을 척결하려다 오히려 노론의 칼에 실각하고 말았다.

 


<참고자료>

한국 사람 만들기, 함재봉, 아산서원, 2017, 362~364

안의순, 대원군의 경제정책 - 재정확보에 관하여, 동양고전통서 제8, 1997. 5.

고종시대의 리더십, 오인환, 2008, 열린책들

월간 문화재사랑, 화폐이야기

 

<각주 출처>

1) 고종실록, 고종 1210

2)朝鮮田制考, 成大慶, 대원군정권성격연구 (성대 박사논문, 1984) 재인용.

3) 고종실록, 고종 31030

4) 고종실록, 고종 3116

5) 안의순, 대원군의 경제정책 - 재정확보에 관하여

6) 월간 문화재사랑, 화폐이야기, 2009. 3. 5.

7) 고종실록, 고종 463

8) 고종실록, 고종 1010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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