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플레이션⑤…재앙으로 돌아온 신대륙의 금은
인플레이션⑤…재앙으로 돌아온 신대륙의 금은
  • 박차영 기자
  • 승인 2021.01.08 12: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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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세기 스페인 가격혁명…금은 넘쳐나면서 물가 폭등, 전쟁비용 상승

 

16세기초에서 17세기 중반까지 아메리카 신대륙에서 엄청난 금과 은이 스페인으로 흘러들었다. 금과 은을 통화의 기본단위로 했던 스페인에 막대한 양의 통화가 흘러넘쳤다. 150년 사이에 물가는 여섯배로 올랐다.

경제사학자들은 이를 가격혁명(Price revolution)이라고 명명했다. 물가 상승이란 개념이 없던 중세 유럽에 처음으로 가격이 오르는 현상이 빚어진 것이다. 그래서 혁명(revolution)이란 용어가 붙었다. 하지만 인플레이션율은 연평균 1~1.5%에 불과했다. 현대의 개념으로 보면 매우 억제된 통화팽창이지만, 상당한 시간이 경과한 후에 사람들은 물가가 오른 것을 인식하게 되었다.

가격혁명은 스페인에서만 일어난 것이 아니다. 스페인의 금화와 은화가 합스부르크령 네덜란드로 흘러들어갔고, 그 이웃나라로 파급되면서 유럽 전반에 인플레이션이 발생했다.

 

16세기 스페인의 세비야 항 /위키피디아
16세기 스페인의 세비야 항 /위키피디아

 

16세기 유럽은 금과 은을 화폐로 사용하는 복본위제(bimetallism)를 채택하고 있었다. 유럽의 봉건왕조는 화폐로 사용할 수 있는 금과 은을 많이 확보하는 것이 국가의 부()를 증대시키는 가장 확실한 방법이라고 생각했고, ·은을 찾아 정복의 길을 걸었던 것이다.

1520~1530년대, 스페인의 군대는 아메리카대륙의 아즈텍과 잉카제국을 멸망시키고, 그곳의 금은 보화를 보물섬에 가득 싣고 세비야(Seville)항에 도착했다. 이 보화는 스페인 국왕이자 신성로마제국 황제인 카를 5(Karl V)의 영토팽창 욕구를 충동질했다.

카를 5세는 이 금을 담보로 독일 금융가문인 푸거가(Fuggers)와 벨저가(Welsers), 이탈리아 제네바 상인들에게서 빌렸다. 재위 36년 동안 카를 5세는 아메리카에서 들어오는 금과 은을 녹여 자신의 영토욕과 신성로마제국 황제 선거에 펑펑 썼다. 새로 발행되는 주화는 저지대 상업도시인 안트워프(Antwerp)로 흘러 갔다. 그곳에 푸거가와 벨저가의 은행들은 스페인 주화를 빨아 당겼다.

 

볼리비아의 포토시 광산 /위키피디아
볼리비아의 포토시 광산 /위키피디아

 

16세기초 스페인 젊은이들은 일확천금의 꿈을 꾸고 아메리카로 몰려 갔다. 1503년부터 1510년까지 금 4.9톤이 세비야항으로 들어왔다. 1510년대의 금 유입량은 9.1, 1520년대 4.9톤이 들어왔고, 1550년대엔 42.6톤이 유입되어 절정을 이뤘다. 하지만 아메리카는 언제까지나 노다지가 아니었다. 그후 금 유입량은 줄어들어 17세기 초에 연간 1~2톤으로 줄어들었다.

아메리카에서 금을 대신한 것은 은이었다. 멕시코와 남미 포토시(Potosi)에서 대량의 은광이 발견되었다. 1560년부터 1640년까지 신대륙에서 생산된 은은 연평균 185~320톤에 이르렀다는 분석이 있다. 은을 캐는데는 엄청나게 많은 인력이 소요되었다. 스페인은 인디오들을 강제노동에 내몰았다. 하루 10시간 이상 갱도 노동과 30년이 지나야 풀려나는 강압 아래 많은 인디오들이 목숨을 잃었다.

은은 유럽에서도 발굴되었다. 1520년대에 보헤미아(체코)의 요하힘스탈(Joachimsthal)에서 대량의 은광이 발굴되었다. 신대륙에서 들어오고 유럽에서 채굴되고 은이 넘쳐났다.

 

체코 요아힘스탈에 있는 유럽 최초 은광 /위키피디아
체코 요아힘스탈에 있는 유럽 최초 은광 /위키피디아

 

프랑스에서도 물가가 상승했다. 1568년 프랑스의 철학자 장 보뎅(Jean Bodin)은 프랑스의 물가 상승이 스페인의 금은 유입에 따른 것이란 결론을 내렸다. 주화의 양적 팽창이 물가 상승을 이끈다는 것을 당시 사상가들은 꿰뚫은 것이다.

현대에 스페인의 가격혁명을 연구한 사람은 미국의 경제사학자 얼 해밀튼(Earl Hamilton)이다. 해밀튼은 1934년에 "신대륙에서 금은의 유입 증가가 스페인에서의 가격혁명의 주된 원인이라고 결론지었다. 1501년과 1600년 사이에 스페인에서 물가상승률은 네 배였다. 해밀턴은 스페인의 물가가 1501년과 1550년 사이에는 완만하게 상승하다가 1550년에서 1600년까지 정점에 이르렀다고 분석했다. 이는 신대륙에서 들어오는 금은의 양과 거의 일치했음을 보여주었다.

인구팽창도 물가 상승을 부채질했다. 1460~1620년 사이에 유럽의 인구는 증가했지만 식량공급이 늘어난 인구를 따라잡지 못했다. 인구 증가는 곡물가격 상승을 동반했다.

 

16세기, 스페인과 포르투갈의 항로 /위키피디아
16세기, 스페인과 포르투갈의 항로 /위키피디아

 

물가 상승은 스페인의 인건비를 올려 외국인 노동자들을 불러들이는 요인으로 작용했다. 주로 프랑스 노동자들이 피레네 산맥을 넘어왔다. 스페인에선 엘도라도 광산(전설상의 금광)에서 힘들게 일하는 것은 프랑스인들을 부유하게 만들기 위해서다는 말도 생겼다.

스페인에게 신대륙의 금과 은은 축복이 아니라 차라리 저주였다. 물가가 오르면서 전쟁비용도 상승했다. 욕심많은 카를 5세는 벨저 가문에 돈을 빌리고 베네수엘라를 떼 주었다. 베네수엘라에서 금과 은을 캐서 가져가라는 것이었다. 벨저가의 베네수엘라 경영은 오래가지 못했지만, 이는 스페인의 부채가 심각하게 불어나고 있음을 반증했다. 카를 5세 재위기간에 금리는 17%에서 48%로 뛰어 올랐다.

카를 5세가 스페인의 재원을 낭비하자 스페인 의회(코르테스)가 등을 돌리고 국민들의 원성을 샀다. 그는 말년에 합스부르크 제국을 분할해 스페인과 이탈리아, 플랑드르를 펠리페 2세에게 물려주고, 신성로마제국과 독일영지는 동생 페르디난트에게 양도했다.

하지만 이 때, 스페인은 이미 기울어 있었다. 카를 5세를 이은 필리페 2세가 오스만 투르크와 벌인 레판토 해전에 참전하는 바람에 1572년 군사비 지출이 신대륙에서 긁어온 금과 세금을 모두 합친 것보다 2배나 되었다. 1576년에 펠리페 2세는 병사들에게 줄 급료가 국가 세입의 2.3배에 달하자 채권자들에게 디폴트를 선언했다. 또한 국왕은 부채의 만기를 장기로 전환할 것도 강요했다.

이때 스페인은 공채를 발행한다. 펠리페 2세는 영국과의 전쟁에서 패해 막강한 무적함대를 바다에 처넣었다. 그 금액이 연간 세입의 다섯배에 해당하는 것이었다고 한다.

펠리페 2세 이후에도 스페인은 1596, 1607, 1627, 1647년에도 모라토리엄(채무불이행)을 다섯 번이나 반복했다. 국가 신용은 떨어지고 경제는 내리막길을 걸었다. 재정이 악화하면서 국왕들의 입지도 좁아져 새로운 사업을 펼칠수도 없었다. 당시 스페인 사람들은 역대 국왕에 대해 이렇게 평가했다고 한다.

 

스페인의 합스부르크 왕가가 카톨릭의 수호자임을 자처하면서 신대륙에서 얻은 부를 전쟁비용으로 소모했다. 그 득은 이탈리아의 제노바 상인들이 얻었다.

제노바 공화국은 스페인 왕가와 밀착해 자금을 대줬다. 물론 공짜 돈은 아니었다. 이자를 꼬박꼬박 붙였다. 스페인의 식량 공급도 제노바 상인들이 떠맡았다. 아메라카 뉴스페인에서 들어오는 부는 세비야를 거쳐 제노바로 몰렸다.

스페인의 인플레이션은 1640년 무렵에 신대륙에서 들어오는 금과 은이 줄어들면서 그 막을 내렸다.

 


<참고자료>

Wikipedia, Price revolution

Wikipedia, Spanish treasure fleet

네이버 지식백과, 증가하는 국제 무역과 물가 폭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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