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 인도네시아④…몽골 격퇴한 자바 왕
고대 인도네시아④…몽골 격퇴한 자바 왕
  • 김현민 기자
  • 승인 2023.12.09 17: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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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빌라이, 자바 공격했으나 비자야에게 패배…마자파힛 제국 등장의 계기

 

몽골의 대칸 쿠빌라이(재위 1264~1294)는 나라 이름을 대원(大元)이라 정하고 남송을 멸망시키고 중국을 통일했다. 그는 중국 바깥으로 눈을 돌렸다. 쿠빌라이는 고려와 합동으로 일본을 침공했으나 실패하고 남쪽으로 베트남, 참파, 미얀마를 공격했다. 몽골은 남방의 해상항로에 눈독을 들였다. 말레이반도와 순다열도의 항구도시들에게 사절을 보내 조공을 바치라고 했다. 몽골이 유라시아를 제패하고 남쪽으로 내려온다는 소식에 팔렘방, 잠비-믈라유, 사무드라-파세이 등 수마트라 섬의 항시(港市)들이 쿠빌라이에게 조공사절단을 보내 우호관계를 맺었다.

하지만 유독 자바섬의 싱하사리(Singhasari)만이 몽골에 조공을 바치지 않았다. 쿠빌라이는 맹기(孟琪)라는 사신을 자바섬에 보냈다. 당시 싱하사리의 왕은 크르타느가라(Kertanegara)였다. 그는 자바섬을 장악한 후 수마트라 섬에 군대를 보내 지배영역을 확대하는 중이었다. 이 야심만만한 군주는 조공을 바치라는 중국의 요구를 불쾌하게 생각했다. 자바의 왕은 몽골 사신의 얼굴을 인두로 지져 문신을 새기고 귀를 잘라 버렸다. 자바에서는 도둑에게 행하는 징벌이었다. 몽골이 남의 나라를 도둑질하려 한다고 경고를 보낸 것이다. 쿠빌라이는 돌아온 사신을 보고 진노했다.

12923월 쿠빌라이는 크르타느가라를 야수라고 부르고 정벌을 명했다. 원사(元史)에는 25,000~3만명의 원정대를 모집하고, 500~1,000척의 배를 준비했다고 쓰여 있다. 몽골족 출신 시비를 총대장에 임명하고, 그 밑에 위구르족 츌신 이그미시(Yighmish)와 한족 출신 가오싱(高興)을 부대장으로 두었다.

몽골이 두차례에 걸쳐 일본정벌(1274, 1281)에 실패한지 10여년만 다시 해상원정길에 오른 것이다.

 

쿠빌라이 초상화 /위키피디아
쿠빌라이 초상화 /위키피디아

 

몽골이 침공 준비를 하는 시기에 크르타느가라는 수마트라를 공략하고 있었다. 싱하사리의 주력부대가 수마트라로 파병되어 왕궁이 비어 있는 틈을 타서 크디리(Kediri)의 자야캇왕 (Jayakatwang)이 공격했다. 크르타느가라가 급히 회군해 크디리 군대와 싸웠으나 패배해 살해되었다.

크르타느가라에겐 사위 라든 비자야(Raden Wijaya)가 있었다. 비자야는 전세가 기울었다고 판단하고 자야캇왕에게 항복하고 목숨을 구걸했다. 자야캇왕은 승자의 아량을 베풀어 비자야를 살려주고는 산속에 들어가 농사나 지으며 조용히 살라고 했다. 비자야는 타릭(Tarik)이라는 삼림지대에 들어가 새로운 정착지를 만들었다. 그곳의 이름은 마자파힛’(Majapahit)'이라고 지었는데, “쓴맛(pahit)이 나는 현지 과일(maja)”이라는 뜻이다. 인도네시아판 와신상담(臥薪嘗膽)의 스토리가 여기서 나온다.

 

라든 비자야 /위키피디아
라든 비자야 /위키피디아

 

몽골군은 1292년말 취안저우(泉州, 푸젠성)에서 출항했다. 그들은 베트남 남부 참파를 들러 보르네오 서쪽의 겔람섬을 거쳐 자바로 내려갔다. 몽골은 13931월에 자바 해안에 도착해 여러 섬에 다루가치(達魯花赤)를 보내 복종을 요구했다.

상하사리의 비자야는 몽골의 대부대가 자바를 정벌하러 온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는 몽골군을 이용해 크디리를 제압할 절호의 기회로 판단했다. 비자야는 몽골 장수에게 사신을 보내 크느타르가라가 사망했음을 알리고, 자신은 몽골에 투항할 것임을 밝혔다. 그는 공동전선을 펴서 크디리를 제거하자고 제안했다. 그 조건으로 자신의 딸 둘을 공녀로 보내고 별도의 조공을 바치겠다고 약속했다.

 

인도네시아로 향하는 몽골 해군 /위키피디아
인도네시아로 향하는 몽골 해군 /위키피디아

 

크느타르가라가 죽었다고 몽골의 목적이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몽골은 동남아 해상패권을 쥐고자 머나만 해상원정을 단행한 것이었다. 크디리의 자야캇왕은 크느타르가라와 마찬가지로 몽골에 대항할 의사를 분명히 했다. 몽골의 총대장 시비는 비자야의 제안을 받아들여 크디리를 공격하기로 했다.

 

12933월 몽골군은 비자야의 길 안내를 받아 크디리의 군대를 격파하고 자야캇왕을 포로로 잡았다. 전쟁을 끝내고 비자야는 시비에게 조공을 준비하기 위해 고향으로 돌아가겠다고 했다. 그리고 두 명의 공주를 데리고 갈 병사를 보내되, 무장을 하지 않고 오라고 했다. 조공품이 많기 때문이기도 하거니와, 공주들이 무장군인을 두려워한다고도 했다. 몽골장수 시비는 비자야의 말을 조금도 의심하지 않았다. 그에 비해 한족 출신 부하장수 가오싱은 비자야가 거짓말을 한다고 보고 돌려보내지 말 것을 주장했다. 하지만 몽골과 색목인 장군은 한족장군의 말을 듣지 않았다.

가오싱에겐 사람을 보는 눈이 있었다. 비자야는 길 옆에 병사를 매복시켰다. 공주를 데리러 몽골병사 200명이 비무장으로 오고 있었다. 매복해 있던 비자야의 병사들은 그들을 덥쳐 몰살시키고, 그길로 몽골군 야영지를 기습했다. 몽골군은 병력의 60%를 잃었다. 역사학자들은 이때 죽은 몽골병이 12,000~18,000명에 이를 것으로 추산한다.

총대장 시비는 고민에 빠졌다. 남은 병력으로 비자야 세력을 공격할 것인지, 돌아갈 것인지를 판단해야 했다. 곧 바람의 방향이 바뀐다. 중국으로 돌아가는 무역풍을 기다리려면 6개월을 더 기다랴야 한다. 시비는 적들로 둘러싸인 곳에서 장시간을 버티기 어려운데다 몽골군이 열대 밀림에 익숙치 않다고 보았다. 그들은 결국 돌아가기로 결심하고 짐을 싸 배에 올랐다. 12938월초 몽골군은 중국 해안에 도착했다.

 

몽골의 자바 공격로 /ScienceDirect
몽골의 자바 공격로 /ScienceDirect

 

쿠빌라이는 패해서 돌아온 장군들을 노여워 했다. 라든 위자야에게 속은 시비는 곤장 70대에 재산 3분의1 몰수, 위구르 장군에게는 재산 3분의1의 몰수의 벌을 받게 되었다. 이에 비해 위자야의 속임수를 경고했던 가우싱은 금 50냥의 상금을 받았다.

쿠빌라이는 다시 자바 공격을 시도했으나 1294년 사망함으로써 그의 꿈은 사라졌다. 몽골군이 물러난후 라든 위자야는 인도네시아와 말레이반도를 아우르는 마자파힛 제국을 세우게 된다. 마자파힛의 지배영역은 오늘날 인도네시아 영토를 형성하는 모태로 간주된다.

 


<참고한 자료>

Wikipedia, Mongol invasion of Java 

Wikipedia, Raden Wijaya 

ScienceDirect, Mongol fleet on the way to Java: First archaeological remains from the Karimata Strait in Indonesia 

동남아의 역사와 문화, 매리 하이듀즈, 2012, 솔과학

동남아시아사, 소병국, 2020, 책과함께

과거 몽골의 자바 침공 기사(아틀라스 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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