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덜란드의 황금목걸이가 된 순다열도
네덜란드의 황금목걸이가 된 순다열도
  • 김현민 기자
  • 승인 2024.01.03 10: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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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 인도네시아⑧…강제경작제도로 주민 착취, 후에 중국인 쿨리 채용

 

네덜란드의 정치만평가 요한 브라켄시에크(Johan Braakensiek)네덜란드의 가장 귀중한 보물이란 제목의 삽화를 그렸다. 한 여인이 인도네시아 섬들을 보석처럼 꿴 목걸이를 자랑하는 그림(아래)이다. 이 만평처럼 유럽의 소국 네덜란드는 자국보다 면적이 50배나 넓고 인구도 10배 이상 많은 순다열도를 보석으로 여겼다. 19세기 전반에 네덜란드 정부 세입의 절반 정도가 식민지 동인도(East Indies, 지금의 인도네시아)에서 창출되었다. ‘

하지만 네덜란드에 부를 가져다준 순다열도는 착취의 현장이었다. 1850년 물타툴리(Multatuli)라는 필명의 작가는 소설 막스하벨라르(Max Havelaar)를 출간해 센세이션을 일으켰다. 본명이 에두아르트 데케르(Eduard D. Dekker)인 이 작가는 당시 네덜란드 식민당국이 실시하던 강제경작제도로 인해 자바인들이 겪는 고통을 적나라하게 폭로했다. 네덜란드어로 퀼튀르스텔셀(cultuurstelsel)이란 제도는 영어로 ’Cultivation System‘으로 번역되는데, 우리말로는 달리 표현할 길이 없어 강제경작제도라고 하면 되겠다.

 

요한 브라켄시에크이 그린 “네덜란드의 가장 귀중한 보물”이란 제목의 삽화 /위키피디아
요한 브라켄시에크이 그린 “네덜란드의 가장 귀중한 보물”이란 제목의 삽화 /위키피디아

 

19세기초 네덜란드는 자바 전역에 대한 지배권을 확보하고 식민지의 이익을 극대화하기 위해 돈이 되는 환금상품을 재배할 계획을 세웠다. 사탕수수, 인디고, 담배, 차가 대표적인 환금상품이었다. 1929년 요하네스 판덴 보쉬(Johannes van den Bosch)는 강제경작제도를 고안해 정부에 보고하고, 자신이 자바 총독으로 부임했다.

이 제도는 자바인들에게 경작지의 20%에 환금작물을 심도록 강제했다. 농민들은 1년의 3분의1120일 이상 환금작물 재배에 의무적으로 노동을 해야 하며, 나머지 시간도 식민정부가 지정한 노동에 동원되었다. 1년 내내 농사철인 열대의 나라에선 농민들이 쉴 시간이 없었다. 체력 소모는 엄청났다.

보쉬 총독이 이 제도를 실시하면서 식민정부의 재정은 급속도로 개선되었다. 식민정부는 이익금의 상당액을 본국에 송금했고, 유럽의 작은 나라는 아시아 섬에서 올라오는 공돈으로 흥청거렸다. 하지만 순다 열도의 원주민들은 혹사당했다. 농한기의 개념이 없는 열대인들은 과도한 체력소모로 쓰러지고 아사하는 사태가 속출했다. 이 시기에 자바인의 사망률은 30%에 이르렀을 것이란 추정이 있다. 만약 강제경작제도가 계속되었다면 사망률은 10~20%P 정도 더 상승했을 것이란 연구도 있다.

네덜란드에도 그나마 양심은 있었다. 스페인의 합스부르크 가문에게서 독립하기 위해 80년이나 투쟁했던 나라였다. 때마침 미국에서 남북전쟁이 벌어져 국제적으로 노예노동에 대한 비판이 고조되던 시기였다. 네덜란드 지식인들은 소설 막스하벨라르에 충격을 먹고 식민지배 정책의 개선을 요구했다. 1870년 네덜란드 정부는 강제경작제도를 공식적으로 폐기했다.

자바섬의 천연고무 수집 /위키피디아
자바섬의 천연고무 수집 /위키피디아

 

강제경작이 폐기된 이후 네덜란드 식민당국은 중국인 쿨리(Coolie)를 고용하게 되었다. 미국에서도 노예해방 이후 철도건설에 중국인을 대거 고용되었으니, 쿨리는 당시 세계적 범위에서 채용되었다.

경제시스템도 식민당국이 주도하는 관제 경제에서 기업가들에 의한 민간 경제로 이행했다. 1869년에 설립된 델리사(Deli Company)는 중국인, 인도인, 바탁인, 말레이인 등을 데려와 대규모 플랜테이션 농업을 경영했다. 19세기말에서 20세기초 사이에 수마트라 섬에 중국인 쿨리가 50만명 이상 투입된 것으로 추정된다.

쿨리는 임금노동자이지만 자유로운 신분은 아니었다. 그들은 여비와 생활비, 물품구입비, 담배와 술 아편 등의 비용을 회사에서 빌려 해결했다. 계약기간이 만료되어 채무를 변제하지 못할 경우 그 일을 계속해야 했고, 도망치려다 잡힐 경우 엄격한 처벌을 받았다. 쿨리의 근로환경은 열악했다. 콜레라와 같은 전염병에 노출되어 사망률이 높았다.

동인도 식민지의 열악한 노동환경에 대한 비판이 끊이지 않자, 1901년 빌헬미나 여왕은 윤리정책을 시행한다. 경제이익만 챙기는 것이 아니라 인도주의도 동시에 시행한다는 것인데, 이는 식민지에서 여론이 악화되는 것을 완충하는 미봉책에 불과했다.

쿨리 가운데 돈을 아끼고 굴려 부자가 되어 현지에 눌러 앉은 경우가 있었다. 이들은 인도네시아에 남아 화교의 일원이 된다.

네덜란드령 동인도의 환금작물은 20세기로 넘어가면서 생산량이 급증했다. 설탕은 1900년에서 1930년 사이에 4배나 증가했고, 담배, 후추, 코프라(코코넛 씨앗과 열매를 말린 것), 커피의 생산량도 급증했다. 광물 가운데 주석은 이 기간에 무려 11배나 늘었다.

 

1905년 로열더치셸이 시추한 북수마트라 팡카란 브란단의 석유시추공 /위키피디아
1905년 로열더치셸이 시추한 북수마트라 팡카란 브란단의 석유시추공 /위키피디아

 

20세기 들어 동인도는 석유와 고무 생산에 집중했다.

1883년 네덜란드 사업가 얀스 지이커르(Jans Zijlker)가 북부 수마트라에서 석유시추에 성공했고, 1888년엔 양질의 원유를 생산하게 되었다. 그는 1990로열‘(Royal)이란 상호도 얻어내 로열더치(Royal Dutch)라는 석유회사를 차렸으나, 그해 열대병에 걸려 급사했다. 이 회사 이사로 있던 장 케슬러(Jean B. A. Kessler)가 사장이 되어 회사를 확장시켰고, 1907년 영국의 셸(Shell)사와 합병해 로열더치셸이 되었다. 로열더치셸은 당대 최대의 석유회사였다.

수마트라에 원유가 생산된다는 소식에 자본가들이 뛰어들어 동인도 열도에 석유산업이 빠르게 번창했다. 1920년대엔 검은 황금에 눈이 먼 탐색자들이 수마트라에서 자바, 보르네오를 헤집고 돌아다녔고, 석유회사가 50개에 이르렀다. 남양제도의 원유를 아시아의 강자로 부상하던 일본이 눈독을 들이게 되었다.

석유산업은 자동차산업을 발전시켰고, 이에 천연고무 생산도 촉진되었다. 고무나무는 1864년에 재배되기 시작했으나 그다지 좋은 성과를 내지 못하다가 1900년에 브라질 원산의 개량종이 시험재배에 성공하면서 본격적인 재배에 들어갔다. 1912년에는 고무가 수출되기 시작했고, 고무산업이 붐을 이루었다. 1930년대에 네덜란드령 동인도에서 플랜테이션 농업면적의 44%에 고무나무가 심어졌다.

 

환금성 작물재배와 석유산업의 활황에 힘입어 열도의 인구가 팽창했다. 자바섬(마두라 포함)의 인구 가운데 토착인은 19002,840만명에서 19203,440만명, 1930년에 4.090명으로 늘어났다. 자바섬 이외의 지역까지 포함하면 1930년대에 인도네시아 인구는 6,000만명을 넘어섰다. 이러한 인구팽창은 지배자에겐 값싼 노동력을 제공하는 원천이 되지만, 원주민에겐 가난의 질곡에 허덕이는 원인이 되었다.

 


<참고한 자료>

Wikipedia, Max Havelaar 

Wikipedia, Dutch East Indies 

Wikipedia, Shell plc 

Wikipedia, Jean Baptiste August Kessl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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