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 인도네시아⑥…정화의 충격
고대 인도네시아⑥…정화의 충격
  • 김현민 기자
  • 승인 2023.12.13 15: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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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화, 팔렘방 일대 중국 해적 진압…해상패권이 마자파힛에서 말라카로 이전

 

인도네시아 말루쿠 군도(Maluku Island)는 술라웨시 섬과 뉴기니아 사이에 있는 작은 섬의 집합으로, 향료군도(Spice Islands)라고 불린다. 육두구, 정향과 같은 향료가 많이 생산되고, 대항해시대 이후 포르투갈에 이어 네덜란드, 영국이 군침을 흘렸던 곳이다.

이곳의 향료는 서양인이 오기 전부터 동양에 알려져 있었다. 중국 원대의 도이지략(島夷志略)에는 문노고’(文老古), 명사(明史)에는 미락거’(美洛居)로 향료의 원산지로 알려져 있었다. 남송 사람 주거비(周去非)1178년에 쓴 영외대답’(嶺外代答)에서 번국 가운데 재화와 부가 풍성하고 보화가 많기로는 타체(아랍)만한 나라가 없으며, 다음으로 초포와 산폿시가 있다고 했다. 여기서 말하는 초포는 자바 동부의 크디리 왕국이며, 산폿시는 수마트라의 스리비자야를 일컫는다. 남송 시대에 초포가 중국에 알려진 것은 향료 때문이다. 서양인들이 들어오기 훨씬 전에 말루쿠 제도의 향료가 동양인의 식탁에 올랐고, 이를 거래하는 자바섬의 왕국들이 돈을 끌어모은 것이다. 크다리(초포), 싱하사리, 마자파힛의 본거지는 자바 동부였다. 그곳의 항구도시는 해상권을 쥐고 말루쿠의 향료를 거래했다.

 

말루쿠 군도 /위키피디아
말루쿠 군도 /위키피디아

 

9세기말 중부 자바의 마타람 왕국이 동부 자바로 천도한 것은 화산 폭발로 인해 어쩔수 없는 선택으로 보이지만 향료군도에 근접하는 뜻밖의 이득을 얻게 되었다. 몰루카는 수마트라 팔렘방의 스리비자야보다는 멀고 자바 동부에선 가까웠다. 자바 동부의 세력은 향료무역을 독점하고, 스리비자야와의 경쟁에서 우위를 점하게 되었다.

1293년 몽골()이 자바섬을 공격한 것은 싱하사리의 왕이 몽골 사신에게 모욕을 준 것이 빌미가 되었지만, 몽골이 남양군도의 향료무역을 쥐기 위한 시도였다는 해석도 있다. 쿠빌라이 당시에 몽골은 동유럽, 중동, 페르시아까지 석권한 시점에서 향료의 주생산지를 손에 넣을 생각을 했을 거란 관측이다.

 

몽골의 자바 침공 이후 순다 열도는 중국인들의 관심을 촉발했고, 중국 해안의 해상세력들이 말래카 해협으로 진출했다. 그중 대표적인 인물이 진조의(陳祖義).

진조의는 중국 광둥(廣東)성 출신이다. 그는 수마트라 팔렘방에 근거지를 둔 해적 두목이었는데, 5,000명의 부하와 10척의 선박을 거느렸다고 한다. 중국에선 팔렘방을 구항(舊港)이라 불렀다. 당시 진조의 일당은 동남아에서 가장 세력이 큰 해적이었다. 일당은 인도와 중국을 잇는 말라카 해역을 가로막고 상선을 약탈하고 괴롭혔다.

명의 3대 황제 영락제는 조카 건문제의 제위를 찬탈한 원죄를 안고 있었다. 영락제는 이슬람교도였던 정화(鄭和)에게 도주한 건문제를 찾아 남방 대원정에 나설 것을 명령했다. 1405년 정화는 함선 62척에 28천명의 선원을 태우고 남지나해와 인도양을 거쳐 대항해를 하고 돌아갔다.

황제의 명을 받은 정화가 동남아를 오갈 때 진조의는 정화에게 머리를 조아렸다. 진조의는 동시에 영락 4(1406) 아들 사량(士良)을 입조케 하고 공물을 바쳤는데, 영락제는 해상에서 도적질을 일삼는 조공사절을 인정해주어야 할지 고민했다고 한다.

진조의는 겉으로는 명조와 정화에 허리를 굽혔지만 돌아가는 정화 함대를 습격해 재물을 약탈할 준비를 했다. 팔렘방의 차이나타운 촌장이었던 시진경(施進卿)이 이 사실을 정화에게 고발했다. 이슬람교도였던 시진경의 보고를 듣고 정화는 진조의를 급습해 체포했다. (이를 팔렘방 전투 또는 舊港海戰이라고 한다) 진조의는 명의 수도 난징으로 끌려가 1407년 공개 처형되었다. 명은 시진경에게 팔렘방의 선위사(施進卿)로 임명했다.

 

정화함대의 항로 /위키피디아
정화함대의 항로 /위키피디아

 

정화의 원정은 동남아 도서지역의 패권에 중대한 변화를 일으켰다. 정화는 이슬람 세력에 우호적이었다. 이 무렵 말레이반도 서안에 말라카 술탄국(Malacca Sultanate)이 건국되었다. 말라카의 시조 파라메스와라(Parameswara)는 본래 수마트라 팔렘방의 군주였다. 자바섬의 마자파힛이 팔렘방을 침공하자 파라메스와라는 패해서 말레이반도로 도주해 건설한 나라가 말라카였다. 이 무렵 파라메스와라는 이슬람으로 개종했다.

명의 정화가 대선단을 이끌고 말라카에 들르자 파라메스와라는 중국에 신하를 청했다. 정화는 황제의 이름으로 파라메스와라에게 말라카를 봉토로 주고 국왕으로 책봉했다. 이로써 말라카는 명의 조공국이 된 것이다. 자바섬의 마자파힛에게 쫓겨온 파라메스와라에겐 명나라의 보호를 받아 동남하 해상의 패권을 쥘 기회를 갖게 되었다.

정화를 수행한 명의 통역관 마환(馬歡)은 기행문 영애승람(瀛涯勝覽)에 이렇게 기록했다.

말라카(滿剌加)에는 네 개의 대문과 망루가 있었고, 그것들은 목책으로 둘러 싸여 있다. 외성 안에 내성이 있는데, 내성은 요새처럼 구축되어 있다. 성 내에는 상가와 창고가 즐비했고, 보물 창고도 있었다. 말라카 강이 도시를 둘로 갈랐고, 남쪽 절반은 내성으로 요새화되어 있으며, 그곳에 지배자가 살고 있었다. 북쪽 절반은 다리로 연결되어 있는데, 주거지였으며, 외국인 주거지도 있었다. 부두에는 외국배들이 접안해 다양한 화물을 하역했다.”

말라카는 명나라의 교역기지로 발전했고, 인도양의 인도, 페르시아, 아랍의 배와 중국의 배가 만나는 곳이었다. 말레이시아 역사학자 파라하나 슈하이미에 따르면, 말라카엔 84ㄷ개 언어가 사용되었고, 60개국 상품이 거래되었다.

 

말라카의 정화 기념비 /위키피디아
말라카의 정화 기념비 /위키피디아

 

한편 자바 동부의 마자파힛은 정화 원정으로 심대한 타격을 입었다. 동남아 해상의 무역 중심지가 말라카로 이전한데다 안에서 내란이 일어나 쇠약해 졌다. 마자피힛에 조공을 바치던 피후견국들이 떨어져 나가 말라카로 붙어버렸다. 마자파힛은 힌두교를 중교로 하는 구시대를 대변했고, 말라카는 이슬람의 대표주자였다. 수마트라와 자바섬의 항구도시에 이슬람이 번져오면서 열도가 점차 이슬람화되어 갔다. 이는 마자파힛의 수명을 단축하는 일이었다.

 


<참고자료>

Wikipedia, Spread of Islam in Indonesia 

Wikipedia, Chen Zuyi 

Wikipedia, Chinese Indonesians 

Wikipedia, Maluku Islands 

Wikipedia, Battle of Palembang (1407) 

동북아 역사넷, 진조의 관련 

동남아의 역사와 문화, 매리 하이듀즈, 2012, 솔과학

동남아시아사, 소병국, 2020, 책과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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