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덜란드, 바타비아를 건설하다
네덜란드, 바타비아를 건설하다
  • 김현민 기자
  • 승인 2023.12.17 11: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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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 인도네시아②…네덜란드 풍의 도시 조성, 동방무역의 거점으로 발전

 

네덜란드 사람들은 인도네시아에서 장사꾼의 기질을 보여주었다. 그들은 포르투갈인들이 종교전파에 열중하다가 현지인들의 반발을 샀던 오류룰 범하지 않았다. 대신에 장사에 관한한 배타적 독점권을 얻으려 했다.

네덜란드 상인이 순다 열도에 첫발을 디딘 건 1595년 자바 서부의 반텐 술탄국(Banten Sultanate)이었다. 이때 자바섬은 힌두교 세력이 밀려나고 이슬람으로 대체되었다. 100년전 포르투갈이 발을 들였을 때 있던 순다 왕국을 멸망시키고, 그 곳의 지배자가 된 나라가 반텐이었다.

1602년 설립된 네덜란드 동인도회사(VOC)는 이듬해 반텐의 수도 반탐(Bantam)에 무역 거점을 만들었다. 반텐의 술탄은 모든 국가의 무역업자를 받아들이려 했다. 하지만 네덜란드는 후추 무역의 독점권을 얻고자 했다. 반텐과 네덜란드 사이에 불화가 커졌고, 동인도회사는 1610년 본부를 북부 해안으로 옮겨 자야카르타에 거점을 만들었다. 술탄과 알력을 빚고 있던 왕자가 네덜란드의 조력을 얻고자 허가를 준 것이다. 네덜란드는 현지의 권력갈등, 종족분쟁을 잘 활용했다. 이듬해 이 네덜란드 회사는 자야카르타(Jayakarta)를 가르는 칠리웅강 건너편에 창고와 주택을 지었다.

 

자야카르타(1605년) /위키피디아
자야카르타(1605년) /위키피디아

 

자야카르타가 지금의 자카르타(Jakarta). 이곳은 오래전부터 순다켈레파(Sunda Kelapa)라는 항구도시였고, 힌두교 국가인 순다 왕국의 수도였다. 앞서 포르투갈은 순다켈레파에 무역거점을 형성하려고 순다 왕국과 협약을 체결했으나, 기지 건설은 무산되었다.

그후 무슬림 왕국인 반텐이 순다를 멸망시키고, ‘승리의 도시라는 의미로 자야카르타라고 이름을 바꾸었다. 반텐은 수마트라 섬과 자바 섬 사이 순다 해협의 길목에 위치했다. 서양 배가 아프리카 남단 희망봉을 돌아 동아시아로 가려면 이 해협을 지나는 것이 빠르기 때문에 순다 해협은 수에즈 운하가 뚫리기 전에 유럽과 아시아의 주요 해로가 되었다.

네덜란드는 향신료 생산지인 말루쿠 열도의 포르투갈을 밀어내고 자야카르타에서 향료 무역 독점권을 얻어냈다. 이 곳은 말루쿠 열도와도 가까웠고, 중국·일본으로 진출하기도 용이했다. 1619년 동인도회사 현지 총독으로 부임한 페테르준 코엔(Pieterzoon Coen)를 자야카르타를 바타비아(Batavia)로 개명하고, 본격적인 무역도시를 건설했다.

 

동인도회사는 바타비아를 네덜란드 식으로 건설했다. 항구에 바타비아 성을 축조하고, 본국처럼 운하를 건설해 배가 도시에 들어오도록 했다. 운하를 따라 가로수와 벽돌 건물들을 지었다. 바타비아 외곽엔 성벽을 쌓았다. 자바 서부의 반텐 왕국, 동부의 마타람 왕국의 공격으로부터 방어하기 위해서였다. 건축물, 도시계획에 네덜란드 양식이 도입되었다. 시청은 전형적인 네덜란드 양식으로 지었다. 시가지 중앙엔 광장이 조성되었고, 주변에 교회, 상점, 관청 건물이 들어섰다. 열대지방의 높은 기온에 대비해 건물 외벽은 흰색으로 구성했다. 지금도 자카르타 구시가지는 17세기 바타비아의 풍경을 확인할수 있다. 바타비아 시절의 대표적인 건축물인 시청 청사는 두 차례의 재건축을 거쳐 현재 자카르타 역사박물관으로 활용되고 있다.

 

​동인도회사의 바타비아(1780) /위키피디아​
바타비아(1682) /위키피디아

 

바타비아는 주변 이슬람 왕국으로부터 공격의 대상이었다. 1628~1629년엔 자바 동부의 마타람 술탄 아궁(Agung)이 침공했으나, 방어에 성공해 VOC의 본부로서 위상을 확고히 했다.

동인도회사는 중국인들을 받아들였다. 주변 술탄국들이 적대적이었기에 무슬림들이 호응이 적은 것도 이유가 되었다. 때마침 중국에 명청 교체기의 혼란이 심각해 동남아시아로의 이주민이 많았다. 중국인들은 열대의 원주민보다 근면하고 계산에 밝았다. 동인도회사는 이들을 화물 하역과 적재에 필요한 노동력으로 활용하거나 회계, 세금징수에 필요한 인력으로 채용했다. 중국계 화인(華人)들은 바타비아 건설에 노동력을 제공했다. 그들은 운하, 주택, 인프라 조성에 참여했다. 또 바타비아 주변에 농부로 일하며 네덜란드인 거주자와 무역상에게 식량을 공급했다. 중국인들은 야채와 사탕수수, 염색에 사용되는 인디고(indigo) 등을 생산했다. 바타비아가 팽창하면서 중국인들의 유입도 늘어났다.

 

바타비아는 동양무역의 거점이 되었다. 네덜란드인들은 포르투갈인과 달리 기독교 선교에는 관심이 없었다. 무슬림이든, 힌두교든 현지인들의 종교를 수용했다. 포르투갈처럼 종교적 분쟁은 일어나지 않았다. VOC는 영토적 지배를 주요 목적으로 삼지 않았다. 도시 유지에 필요한 땅만 확보했다.

네덜란드인들은 무역만은 독점했다. 유럽인이든, 아시아인이든 향신료 거래에 개입하는 것을 배제했다. 영국인들이 말루카 열도의 향료시장을 넘보았으나, 1623 암본 사건을 통해 영국인들을 제압했다. 영국인들인 이 사건 이후 아시아에서 향료전쟁을 중단했고, 네덜란드가 말루쿠의 향료를 독점하게 되었다.

 

바타비아(1682) /위키피디아
동인도회사의 바타비아(1780) /위키피디아

 

바타비아가 급성장하고 부유해지자, 그 배후에 있던 반텐 술탄의 불만이 높아갔다. 반텐은 순다 해협을 내해로 끼고 있었다. 반텐 술탄국은 순다 열도의 강국이었고 강력한 군사력을 갖추고 있었다.

1656년 마침내 반텐이 바타비아에 제동을 걸어오자, VOC는 반텐의 항구를 봉쇄했다. 반텐이 바타비아에 반격했다. 양측의 지리한 공방이 이어지는 가운데 술탄 아겡의 왕자 하지가 네덜란드에 손을 내밀었다. 무슬림 귀족 대부분은 아겡을 지지했다. 왕자 하지는 VOC의 지원을 받아 술탄을 가택연금시키는데 성공하고 권력을 장악했다.

네덜란드는 하지를 지원한 대가로 다른 유럽 세력의 항구 출입을 금지하도록 요구했다. 하지는 이를 받아들였다. VOC는 아겡을 바타비야로 옮겨 억류하고, 권좌에 오른 하지도 굴복시켰다. 이로써 반텐 술탄국은 네덜란드 동인도회사의 보호국으로 떨어졌다. 그후 허울만 남은 술탄이 명맥을 이어갔으나, 그나마 19세기초에 그 지위마저 내려놓고 네덜란드 직할령이 되었다.

 


<참고한 자료>

Wikipedia, Jakarta 

Wikipedia, History of Jakarta 

Wikipedia, Batavia, Dutch East Indies 

동남아의 역사와 문화, 매리 하이듀즈, 2012, 솔과학

동남아시아사, 소병국, 2020, 책과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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