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부터 동양에서 생산되는 향신료가 유럽에 전해졌다. 향신료의 교역로는 흔히 실크로드라 불리는 육로와 해상의 길 두 가지가 있었다. 이슬람이 일어나며 동양과 서양의 무역로를 아랍상인이 잡았다. 아랍 캐러반이 향신료 무역을 하며 일어나는 스토리를 엮은 것이 ‘천일야화’이며, 여기서 파생된 것이 ‘신바드의 모험’이다.
향신료를 향한 모험은 일찍이 동남아시아 해상의 말루쿠 열도의 존재를 부각시켰다. 아랍의 항해자들은 이렇게 기록했다. “자바섬 남쪽에 티모르라고 불리는 많은 섬들이 있고, 티모르 동쪽에는 역시 반담이라고 불리는 많은 섬들이 있다. 반담에는 백단향과 침향, 육두구가 난다. 자바섬 주변이 말루쿠 제도라고 불리며 이 섬은 정향 제도라고도 불린다.”
향신료가 지중해로 건너오면 베네치아 상인의 몫이었다. 1453년 오스만투르크가 콘스탄티노플을 함락하고 향신료 거래가 무슬림에 의해 장악되었다. 베네치아의 장사꾼들은 무슬림 국가와 거래하며 비싼 가격에 향신료를 사들여, 거기에 또 이문을 붙였다.
항해기술이 발달하면서 동양으로 가는 바닷길을 처음 연 나라가 포르투갈이었다. 포르투갈 왕의 명령을 받은 바스쿠 다 가마는 1498년 5월에 아프리카 희망봉을 지나 인도 캘리컷에 도착했다. 포르투갈 탐험대는 동양의 바다에 향신료의 섬이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들이 찾은 인도 항로는 향신료를 구하는 길이었다.
아랍 상인과 베네치아 상인은 포르투갈의 동양진출을 저지했다. 1509년 2월 인도 서해안 디우(Diu)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베네치아는 오스만투르크, 구자라트(인도), 맘루크(이집트)의 편에 섰다. 포르투갈은 이슬람 연합함대를 격파하고 인도 고아에 기항지를 마련했고, 2년후인 1511년 말레이반도에 진출, 말라카를 함락했다.
포르투갈은 말라카에서 멈추지 않았다. 인도 고아의 알부케르크 총독은 인도네시아 반다 열도(Banda Islands)에 향료가 생산된다는 소식을 듣고 부하들을 파견해 그곳을 찾으라고 했다.
그의 부하 중에 프란시스코 세랑(Francisco Serrão)이란 선장이 있었다. 그는 인도네시아 섬을 돌아다니다가 난파했다. 그곳에서 그는 향료가 난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 섬이 말루쿠 열도(Maluku Islands)였다. 1512년 포르투갈의 항해사인 안토니우 데 아브레우(António de Abreu)가 마침내 말루쿠 제도를 찾아냈다. 그는 서양인으로는 최초로 말루쿠 열도에 발을 디딘 인물로 기록된다.
말루쿠 열도 가운데 테르나테, 티도레, 마키안, 모티, 바찬 등의 다섯 개 섬이 향신료의 주산지였다. 이곳에는 세계 어디에도 나지 않는 육두구(nutmeg)와 정향(clove)이 자란다. 육두구와 정향은 육식을 하는 서양인들의 입맛을 돋우었다. 이전에 고기에 쓰던 향신료는 후추였다. 두 향신료의 가치는 후추에 비해 수십배나 비싸게 매겨졌다.
향료는 엄청난 이익을 남겼다. 후추 1킨탈을 12두카트에 사서 4두카트의 비용으로 운반해 유럽에서 32두카트에 팔았다. 포르투갈 왕실은 향료 무역에서 두 배나 많은 이문을 남겼다. 정향, 육두구가 몰루카 열도 암본(Ambon)에서 생산되고 거래된다는 현지의 보고에 포르투갈은 1513년 암본에 요새를 건설하고 병력을 주둔시켰다.
포르투갈은 말루쿠가 너무 멀어 자바섬 서부에 중간기착지를 구축하려고, 순다왕국(Sunda Kingdom)과 협상을 벌였다. 1522년 8월 21일 양측은 동맹을 체결하고 이를 기념해 기념비를 세웠다. (이 기념비가 나중에 발견되었다.) 힌두 왕국인 순다는 이슬람 왕국인 데막의 공격을 받을 때 포르투갈의 지원을 받고, 포르투갈은 자바에 요새를 건설한다는 조건이었다. 하지만 협정은 이행되지 않았다. 포르투갈 내부의 의견이 조율되지 않았고, 순다도 포르투갈을 믿지 않았다.
포르투갈이 말루쿠에서 향신료를 독점하자 스페인이 욕심을 냈다. 토르데시야스 조약에 의해 아시아는 포르투갈의 지배영역이었지만, 이 조약은 지구를 평평하다는 믿음에서 맺은 약속이었다. 1520년 페르디난드 마젤란이 지구를 돌아 필리핀에 도착해 거점을 확보했다. 스페인은 필리핀을 통해 향료거래를 시도했다.
말루쿠 열도는 이미 이슬람이 전파되어 섬마다 술탄들이 지배했다. 향료열도에서 가장 강력한 세력은 테르나테 섬의 술탄이었다. 포르투갈은 현지 술탄들과 요새를 건설하고 식량을 공급받는 내용의 조약을 체결했다. 또 외부의 침략이 있을 경우 군대로 보호해주겠다고도 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포르투갈이 카톨릭을 전파하려 하자, 무슬림들과의 마찰이 빚어졌다. 원주민들은 보호를 원했지만 포르투갈은 식민지로 간주했다. 종교적, 정치적, 경제적 대치가 격화되면서 1530년 테르나테인들이 봉기를 일으켰다. 포르투갈 장교가 테르나테 왕의 아버지를 체포해 반역죄로 사형을 집행하자, 섬의 술탄 다얄이 이웃 섬으로 도주를 했다. 테르나테 술탄은 이웃 섬들을 규합해 포르투갈에 저항했다. 이 폭동은 말라카에서 지원병이 오면서 1537년에 진압되었다.
또 제주이트 교단을 창립한 스페인의 프란스시코 사비에르(Francis Xavier) 신부가 1546년에 말루쿠 제도로 와서 현지 주민에게 선교활동을 벌였다. 사비에르는 2년안에 수천명을 개종시켰고, 암본에 기독교 마을 30곳이 생겨났다. 또 도미니크 수도회의 선교사들도 건너와 선교활동을 벌였다. 바찬의 왕은 1577년에 돈 주앙이란 이름으로 세례를 받기도 했다.
하지만 포르투갈인들은 탐욕적이고 이기적이었다. 바찬이 테르나테의 침공을 받았을 때 도와주지 않았다. 현지인들은 개종을 통해 주변의 공격으로부터 서양인의 보호를 받으려고 했는데, 도움이 되지 않았다. 오히려 개종이 공격의 타깃이 될 뿐이었다.
포르투갈이 보호자가 되지 못한다는 인식이 커지면서 개종자들이 다시 이슬람으로 돌아갔다. 1595년 4만명으로 추정되던 암본의 카톨릭 교인들이 얼마후 3천명으로 급감했다.
포루투갈이 말루카 제도에서 질척거리는 사이에 네덜란드가 향신료 시장을 넘보았다. 1595년 프레데릭 하우트만(Frederick de Houtman)이라는 네덜란드 탐험가는 4척의 함대를 이끌고 자바섬에 도착해 후추 등 화물을 싣고 돌아왔다. 1598년에는 야곱 판 넥(Jacob van Neck)이라는 네덜란드인이 인도네시아에서 대량의 후추를 갖고 귀국했다. 판넥은 후추 무역에서 400%의 이익을 내 상업적으로 대성공을 거두었다. 네덜란드는 이후에도 인도네시아를 안방처럼 드나들며 향료 무역으로 대박을 냈다.
이에 네덜란드 상인들은 1602년 동인도회사(VOC, Vereenigde Oostindische Compagnie)를 꾸려 향신료 무역에 본격적으로 뛰어들었다. VOC가 처음으로 한 일은 해적질이었다. 설립 이듬해인 1603년 2월, 그들은 싱가포르 해역에서 포르투갈 상선 산타 카타리나(Santa Catarina) 호를 나포했다. 그 안에는 엄청난 화물이 실려 있었다. 나포선에서 약탈한 재물로 VOC는 자본금을 50%나 불렸다.
1605년 네덜란드 VOC는 포르투갈에 저항하는 말루쿠 제도의 강자 테르나테의 술탄과 손잡고 암본에서 포르투갈군을 내쫓았다. 1641년에 네덜란드는 포르투갈의 거점기지 말라카마저 공격해 빼앗았다. 이로써 동남아시아의 제해권은 포르투갈에서 네덜란드로 넘어갔다.
포르투갈의 주도권은 단명했다. 부패와 잔인함, 무능, 종교적 맹신이 지배의 효율성을 상실했다. 향료의 섬 주민들은 기독교 침입자를 몰아내는데 성공했으나, 새로운 지배자를 맞게 되었다.
다만 소순다열도 동쪽 티모르섬은 포르투갈의 지배 아래 남았다. 나중에 동티모르가 인도네시아와 별도의 나라로 독립하는 계기가 된다.
<참고한 자료>
Wikipedia, Portuguese Empire in the Indonesian Archipelago
Wikipedia, Spice trade
Wikipedia, Ternatean–Portuguese conflicts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