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덜란드의 한계 드러낸 아체 전쟁
네덜란드의 한계 드러낸 아체 전쟁
  • 김현민 기자
  • 승인 2023.12.27 13: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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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 인도네시아⑥…40년에 걸친 끈질긴 전쟁으로 네덜란더의 기력 쇠약

 

수마트라 섬의 면적은 475,807로 한반도보다 두배 이상 넓다. 면적에서 그린란드, 뉴기니, 보르네오, 마다가스카르, 배핀 섬(캐나다)에 이어 세계 여섯 번째다. 인구는 1억명. 뉴기니와 보르네오가 조금 더 넓긴 하지만, 호주, 말레이시아와 절반 정도 나눠 갖고 있기 때문에 수마트라는 인도네시아에서 가장 큰 섬이다. 자바 섬과 비교하면 수마트라는 면적에서 4배 넓지만 인구에서 3분의2 정도다. 당연 인도네시아에선 자바 섬이 중심이고, 수마트라는 주변도서로서의 위치에 있다.

 

17~18세기에 네덜란드가 자바섬 지배에 주력할 때에 수마트라에는 팔렘방, 아체 등의 이슬람 국가들이 버티고 있었다.

나폴레옹 전쟁 때 네덜란드가 프랑스에 점령되었을 때 영국이 일시적으로 자바섬을 통치한 적이 있다. 전쟁이 끝나자 영국의 자바 총독 토머스 스탬퍼드 래플스는 자바 섬과 말라카를 계속 지배할 것을 주장했지만 두 곳은 모두 네덜란드에 반환되었다.

1819년 래플스는 자바와 말라카를 대신할 영국의 동남아 거점으로 싱가포르에 항구 건설을 추진했다. 싱가포르는 당시 조호르 술탄국의 영토였다. 래플스는 조호르 술탄을 설득해 싱가포르 항만건설권을 얻어냈다.

자바섬의 네덜란드가 반발했다. 조호르는 네덜란드의 보호국이므로 영국과 조호르의 협상은 무효라고 주장했다. 싱가포르 항구가 조성된 후 영국 배가 말라카에 들르지 않고 인도와 중국 사이를 오가자 말라카 항구는 점점 시들해져 갔다. 두 나라 사이에 긴장이 고조되었다. 영국령 캘커타와 네덜란드령 바타비아 사이에 협상이 벌어졌다. 1824년 캘커타와 바타비아는 말라카 해협 북쪽은 영국이 갖고, 남쪽은 네덜란드의 지배권을 인정하는 내용에 합의했다. 이에 따라 말레이반도에 있던 말라카는 영국에 넘어가고, 수마트라에 있던 영국령 벵쿨렌은 네덜란드에게 이양되었다.

 

영국과 네덜란드 사이에 체결된 1824년 조약에 근거해 수마트라는 네덜란드의 종주권이 인정되었다. 이 조약은 후에 말레이족이 인도네시아와 말레이시아로 분리, 독립하는 기준이 된다. 하지만 다른 서양국가와 수마트라의 현지 술탄국의 입장에서는 영국-네덜란드 조약은 자기네들끼리의 나눠먹기에 불과한 약속이었다.

 

파드리 전쟁의 모습 /위키피디아
파드리 전쟁의 모습 /위키피디아

 

서부 수마트라의 미낭카바우 지방에는 일찍부터 메카를 다녀온 무슬림 순례자들이 아라비아반도에서 유행하던 와하비주의(Wahhabism)를 받아들여 종교혁신운동을 벌였다. 이들은 무슬림 근본주의자들로서 사회에 만연하고 있던 도박, 닭싸움, 아편, 주류, 끽연 등의 쾌락성 풍조를 배격하고 근엄한 신앙생활을 강조했다. 이 운동은 순례자들이 항구도시 뻐디르에서 메카로 다녀왔기에 파드리(Padri) 운동이라고 했다. 그 핵심에 모로코 출신의 이맘 본졸(Imam Bonjol)이 있었다.

파드리 운동은 1803년부터 시작된 것으로 기록되는데, 처음에는 비이슬람 관습(Adat)의 척결에 초점을 맞추었다. 운동이 격화되면서 개혁을 부르짖는 파드리와 기존 관습을 고수하려는 아다트의 대립이 격화되고 미낭카바우를 중심으로 하는 파가루융(Pagaruyung) 왕국은 혼란 수습을 위해 네덜란드에 지원을 호소했다. 이 시기(1795~1815)에 네덜란드 본국이 나폴레옹의 프랑스에 점령되어 있었기에 지원군을 파견하지 못했다. 나폴레옹 몰락 이후 네덜란드가 자바섬을 되찾고 수마트라 사태에 개입할 여력이 생겼다.

1821년 네덜란드 식민당국은 수마트라 서부 미낭카바우 일대를 보호국으로 하는 조약에 서명하고 본격적으로 파드리 사태에 개입하게 되었다. 그런데 자바섬에서 저항운동이 일어나 자바전쟁(1825~1830)이 일어남에 따라 수마트라에 집중하지 못했다. 자바전쟁이 끝난후 네덜란드는 파드리와의 전쟁에 들어가 1837년 이맘 본졸의 근거지를 함락함으로써 서부 수마트라를 제압했다. 파드리 전쟁은 네덜란드가 수마트라로 지배영역을 확장하는 계기가 되었다.

 

아체술탄국과 영향권 /위키피디아
아체술탄국과 영향권 /위키피디아

 

수마트라 최북단 아체(Aceh) 지역은 전세계 후추 공급량의 절반 이상 생산하고 있었다. 아체 술탄국은 후추 생산을 통해 부를 축적하고 그렇게 쌓은 국력으로 수마트라의 작은 왕국들에 영향력을 행사했고, 동부의 시악(Siak) 술탄국도 보호의 범위에 넣었다. 반면에 네덜란드도 수마트라에 교역권을 넓히면서 두 나라가 충돌하게 되었다.

아체는 네덜란드의 확장을 저지하고 독립을 유지하기 위해 영국, 프랑스 등과 외교 지평을 넓혔다. 1852년는 아체의 술탄이 밀사를 보내 프랑스 황제 나폴레옹 3세를 알현했다는 소문이 돌았다. 1858년 네덜란드는 시악의 술탄과 협약을 체결해 보호국으로 만들었다. 말레이반도로 영향력을 확장하던 영국은 네덜란드가 수마트라 동부로 진출하자 견제에 나서 1863~1865년 시악 근처에 군함을 보내 무력 시위를 벌였다.

그러던 영국은 나폴레옹 3세의 프랑스가 인도차이나에 세력을 확장하는 것을 목격하며 입장을 바꾸었다. 1871년 영국은 네덜란드와 협약을 맺어 네덜란드에 수마트라 지배권을 주었다. 그러자 프랑스에 기대려 했던 아체는 다급해 졌다. 아체는 미국과 러시아에 손을 내밀었다.

 

전쟁의 발단은 1873년 아체와 미국의 통상협정의 체결이었다. 아체 술탄국의 대표와 미국 영사가 싱가포르에서 쌍무협정에 서명했다. 이 사실을 알게 되자 네덜란드는 양국 협정이 1871년 영국-네덜란드 협정에 위반한다고 주장했다. 제국주의 시대였다. 네덜란드는 이를 합병의 기회로 삼았다.

326일 네덜란드 함대가 아체의 수도 반다아체를 포격함으로써 전쟁은 시작되었다. 네덜란드는 아체를 만만하게 보고 쉽게 전쟁을 끝낼 줄 알았다. 아체는 서양식 병기로 무장하고 있었고, 이탈리아, 영국으로부터 간접 지원을 받았다. 오스만투르크에도 손을 내밀었으나 오스만은 도와줄 여력이 없었다. 그동안 아체에 욕심을 내던 미국과 프랑스는 중립을 지켰다.

네덜란드 군은 고전했다. 네덜란드는 수차례 전투에 실패했고 요한 루돌프 쾰러 장군이 전사함으로써 일단 퇴각했다.

 

1877년 8월 26일 아체전쟁 중의 사말랑가 전투 /위키피디아
1877년 8월 26일 아체전쟁 중의 사말랑가 전투 /위키피디아

 

2차 전쟁은 그해 11월에 네덜란드가 13,000명의 병력을 동원해 침공함으로써 시작되었다. 식민정부는 전병력을 긁어모아 투입했다. 술탄 마뭇 샤는 수도를 버리고 내륙으로 들어갔다. 네덜란드는 술탄궁을 점령하고 승리를 선언했다. 술탄은 피난처에서 콜레라에 걸려 숨졌다. 전젱이 끝나는가 싶었다. 하지만 마뭇 샤의 손자 이브라힘 만수르 샤가 즉위하면서 정글에서 저항을 이어갔다.

전쟁은 무슬림 지도자들이 참전하면서 지하드의 성격으로 변모했다. 이슬람 지도자들은 결연하게 게릴라전을 펼쳤고, 게릴라들에게 적의 손에 죽는 자는 천국에 들어갈 것이라고 했다. 네덜란드는 지독하게 어려운 전쟁을 치러야 했다.

네덜란드는 국내 이슬람학자들에게서 현지 지배세력을 이용하라는 충고를 받아들였다. 현지어로 울레 발랑(Ulee Balang)이라 불리는 전통귀족들이 네덜란드에 부역해 전투에 참여함으로써 기나긴 전쟁은 끝을 보였다. 아체 전쟁은 1913년에 평정되었는데, 기간으로 40년이 걸렸다. 그후에도 소규모 전투가 벌어졌고, 게릴라 활동은 1943년 일본의 점령 때까지 지속되었다.

전쟁 기간에 콜레라가 번지는 바람에 양측 모두 사망자가 수만명에 이르렀다. 이 참혹한 전쟁은 네덜란드의 인도네시아 지배에 한계를 보여주었다. 유럽의 조그마한 나라가 살상력이 강한 무기만으로 거대한 식민지를 지배한다는 것은 무리였다.

 


<참고한 자료>

Wikipedia, Anglo-Dutch Treaty of 1824 

Wikipedia, Padri War 

Wikipedia, Anglo-Dutch Treaties of 18701871 

Wikipedia, Aceh Wa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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