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도네시아 현대②…일본군에 협조한 수카르노
인도네시아 현대②…일본군에 협조한 수카르노
  • 김현민 기자
  • 승인 2024.01.05 13: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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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군, 전쟁에 인적·물적 동원 요청…수카르노, 독립을 전제로 일본에 협력

 

1940510일 나치 독일이 중립을 표방하던 네덜란드를 침공했고, 네덜란드의 빌헬미나 여왕은 영국으로 도피해 런던에 망명정부를 수립했다. 네덜란드의 식민지였던 인도네시아는 본국이 점령된 상태에서 망명정부의 지시를 받았다.

당시 일본은 공업과 군수에 필요한 석유의 대부분을 수입에 의존하고 있었는데, 필요량의 55%는 미국에서, 25%는 인도네시아에서 수입했다. 2차 세계대전 당시 인도네시아는 미국, 이란, 루마니아에 이어 세계 4위의 산유국이었다. 19418월 미국은 일본에 원유와 가솔린 수출금지조치를 발동했다. 일본은 미국의 경제제재로 인해 생긴 기름 부족을 메우기 위해 네덜란드령 인도네시아에 수입 확대를 요청했다. 하지만 런던의 네덜란드 정부는 나치의 동맹국인 일본에 대해 미국과 동일한 제재를 가하도록 인도네시아 식민당국에 지시했다. 일본은 기름을 구할데가 없어졌다.

1941117일 일본인 하와이 진주만을 기습공격함과 동시에 인도네시아를 침공할 준비를 서둘렀다. 네덜란드도 일본에 선전포고를 했고, 12월 일본군은 자바 섬에 들이닥쳤다. 전투는 오래 끌지 않았다. 해를 넘겨 194238일 일본군은 동부 자바의 칼리자티에서 네덜란드 총독으로부터 항복을 받았다. 일본은 인도네시아를 세 부분으로 나눠 자바와 마두라는 16군이, 수마트라는 25군이 맡고, 보르네오와 나머지 지역은 해군이 맡았다.

 

인도네시아를 점령한 일본군 관구 /위키피디아
인도네시아를 점령한 일본군 관구 /위키피디아

 

일본이 인도네시아를 침공할 당시 수카르노는 수마트라 벵쿨루에서 구금되어 있었다. 일본군이 들이닥치자 네덜란드 식민당국자들은 그를 호주로 데려가려 했다. 그런데 일본군이 너무 빨리 진격했기 때문에 네덜란드인들은 그를 수마트라의 파당에 감금해 놓고 자기네들만 도주했다.

일본이 인도네시아에서 원한 건 석유와 같은 천연자원만이 아니었다. 그들은 6,000만명의 풍부한 인적자원을 활용하고 싶었다. 하지만 현지인들은 일본군에 협조하지 않았다. 322일 일본군 사령부는 민족지도자였던 모하마드 하타(Mohammad Hatta)와 수탄 샤흐리르(Sutan Sjahrir)를 석방했지만 샤흐리르는 일본에 협조를 거부했고, 하타는 설득력이 부족했다. 새 점령자는 수카르노에 눈을 돌렸다.

수카르노는 일찍부터 인도네시아 독립에 일본을 이용할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1929년 무렵 수카르노는 하타에게 언젠가 태평양에 전쟁이 일어날 것이고 일본군이 인도네시아에 온다면 독립의 기회를 맞을 것이라고 예측한 적이 있다.

일본군은 인도네시아를 침공하기 전에 수카르노에 관한 파일을 갖고 있었다. 수마트라의 일본군 사령관은 수카르노에게 정중하게 협조를 요청했고, 수카르노는 선선히 응했다. 19427월 수카르노는 자카르타로 돌아와 하타와 함께 16군 사령관 이마무라 히토시(今村均)를 만났다. 이마무라는 일본군의 전쟁 수행에 인도네시아인들의 협조를 요청했고, 수카르노는 독립을 보장해달라고 했다. 양측의 이해가 맞아떨어졌다.

 

일본군에 동원된 인도네시아 병사들 /위키피디아
일본군에 동원된 인도네시아 병사들 /위키피디아

 

수카르노는 옛 인도네시아국민당(PNI) 지도부와 민족진영에게 네덜란드가 속한 연합군에 반대하고 일본군에 협조하는 것이 독립을 얻는 길이라고 설득했다. 그의 호소가 먹혀들어갔다. 일본군은 인도네시아에서 대규모 인력을 차출했다. 로무샤(労務者)란 일본어가 그대로 적용되어 열도 전역에서 100만명 가량이 동원되었다. 그들은 철도, 공항, 도로 건설에 동원되었으며, 멀리 버마(미얀마) 전선까지 끌려갔다. 농촌에서는 일본군을 위한 식량이 공출되었고, 항공유로 사용될 피마자를 재배해야 했다.

인도네시아인들은 기유군(義勇軍)이란 이름으로 전투에도 참여했다. 기유군은 전쟁 말기에 자바에서 37,000, 수마트라에서 2만명에 달했다. 퍼산트렌(Pesantren)이란 이슬람 기숙학교에서 공부하던 무슬림 학생들은 장교가 되었다. 현지어로 키야이(Kyai)라 불리던 학생 1,000여명은 일본의 선전교육을 받고 전선에 투입되었다.

하지만 모든 무슬림이 일본에 협조한 건 아니다. 이슬람 개혁주의자인 하지 라술은 도쿄의 천황궁을 향해 절하는 황성요배(皇城遙拜)를 거부했다. 무슬림은 오직 알라 신을 위해 메카를 바라보며 기도할 할 뿐이며, 일본인을 위해 허리를 숙일수 없다는 것이었다. 또한 일본을 위해 전쟁에 참여하는 것은 지하드가 아니라고 했다.

사회주의적 경향이 강했던 샤흐리르는 청년들을 중심으로 퍼무다(Pemuda)를 조직해 일본에 저항했다. 좌익은 네덜란드로부터 자금지원을 받았다. 좌파 지도자 아미르 샤리푸딘은 일본군에 체포되어 사형을 언도받았으나 수카르노의 구명운동으로 목숨을 건졌다.

 

일본 점령기에 동자바 말랑에 세워진 일본신사 /위키피디아
일본 점령기에 동자바 말랑에 세워진 일본신사 /위키피디아

 

일본이 해외로 끌고간 로뮤샤는 약 15~40만명에 이르렀는데, 이중 돌아온 사람은 7만명에 불과했다. 또 일본군에 배속된 인도네시아인들은 헌병에 의해 구타, 테러, 체벌로 인해 공포에 떨어야 했다. 일본은 전선에 식량을 공출하기 위해 농촌을 수탈했는데, 그로 인해 수많은 아사자가 발생했다. 이런저런 이유로 일본점령기에 인도네시아인 100만명이 사망했다는 추산이 나온다.

수카르노는 처음엔 군인차출과 식량공출을 독립을 위한 댓가라고 생각했지만 그로 인한 피해가 급증하자 마음 아파했다고 한다. 그럼에도 수카르노는 열도 전역을 돌아다니며 참전을 독려하고 일본에 협력할 것을 호소했다. 그 덕분에 수카르노와 하타는 194311월에 17일간 일본을 여행할 기회가 있었는데, 이때 히로히토 천황으로부터 훈장을 받고, 도죠 히데키(東條 英機) 총리대신의 환대를 받았다.

 

1944년 전세가 반전되자 일본은 인도네시아의 협조가 절실했고, 이를 얻기 위해 독립을 약속했다. 914일 고이소 구나아키 총리는 인도네시아 독립이 임박했다고 공개적으로 밝혔다. 해를 넘겨 19453월 미군이 필리핀에 상륙하자 일본은 인도네시아독립준비위원회(BPUPK)의 결성을 허용했다. 수카르노는 67명의 대표자로 구성된 위원회의 의장을 맡았다.

첫회의가 5월 자카르타에서 수카르노, 하타 등 62명의 민족지도자들이 참가한 가운데 열렸다. 지도자들은 독립국의 이념을 회교국가로 할 것인지, 세속국가로 할 것인지를 놓고 열띤 토론을 벌였다. 수카르노는 세속국가를 원했다. 61일 수카르노는 판차실라(pancasila)라 불리는 5원칙을 발표하면서 독립국 인도네시아는 세속국가를 원칙으로 하되 유일신에 대한 믿음을 강화하는 조건을 수용한다고 밝혔다. 이 원칙이 인도네시아 건국이념으로 정착되었다.

독립준비위원회는 헌법도 입안했는데, 헌법에는 영국령 보르네오 북부와 말레이반도도 영토에 포함시킨다고 규정했다.

89일 수카르노와 하타는 일본군 남방사령관 데라우치 하사이치(寺内寿一)의 부름을 받고 사령부가 있는 베트남 사이공(지금의 호치민시)을 방문했다. 데라우치는 곧 독립을 시켜줄 것이니 준비하라고 했다. 수카르노와 하타는 데라우치에게 영국령도 인도네시아에 달라고 했다. 이에 데라우치는 자신의 소관이 아니라며 답변을 회피했다. 패색이 완연한 일본군이 영국령을 인도네시아에게 떼주겠다고 자신할수 없었을 것이다.

 

1945년 8월 17일 독립선언문을 낭독하는 수카르노. /위키피디아
1945년 8월 17일 독립선언문을 낭독하는 수카르노. /위키피디아

 

수카르노와 하타가 자카르타로 돌아온 다음날인 815일 일본은 항복을 선언했다. 자카르타의 일본군 사령부는 이 사실을 감추었다. 그럼에도 좌파 퍼무다는 일본의 항복 사실을 알게 되었다. 샤흐리르를 비롯해 청년운동가들은 지금바로 독립을 선언할 것을 주장했다. 그에 비해 수카르노와 하타는 일본의 항복이 확인되지 않은데다 연합군이 들이닥쳐 독립을 무산시킬 가능성을 우려했다.

816일 이른 아침 수카르노의 미적지근한 태도를 못마땅해 하던 청년 3명이 자택에서 그를 납치했다. 젊은이들은 수카르노에게 지금이 독립을 선언할 때라고 강조했다. 수카르노도 더 이상 미룰 일이 아나라고 판단했다. 다음날인 817일 수카르노는 하타와 함께 500여명의 군중들 앞에 나타나 독립선언문을 낭독했다. 그들은 연합군이 진주하기 앞서 독립을 기정사실화했다.

 


<참고한 자료>

Wikipedia, Dutch East Indies campaign 

Wikipedia, Japanese occupation of the Dutch East Indies 

Wikipedia, Proclamation of Indonesian Independence 

Wikipedia, Sukarn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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