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극의 발리섬, 관광지가 된 사연
비극의 발리섬, 관광지가 된 사연
  • 김현민 기자
  • 승인 2023.12.28 14: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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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 인도네시아⑦…네덜란드, 푸푸탄의 잔학성 덮기 위해 관광지로 개발

 

인도네시아 발리 섬은 우리나라 관광객들이 많이 찾는 곳이다. 섬은 자바섬 동쪽에서 3.2km 떨어져 거의 붙어 있는 것처럼 보이며, 이 섬에서부터 길게 이어지는 열도를 소순다열도(Lesser Sunda Islands)라고 부른다. 섬의 면적은 5,780로 제주도의 3배쯤 되며, 인구는 440만명이다. 특이한 것은 인도네시아가 이슬람국가이지만, 이 섬엔 힌두교가 주류다. 전체인구의 87%가 힌두이며, 이슬람이 10%에 불과하다. 이 섬이 독특한 문화를 가진 것은 역사적인 뿌리가 있다.

 

발리 섬의 위치 /위키피디아
발리 섬의 위치 /위키피디아

 

발리 섬이 힌두교의 갈라피고스가 된 것은 15세기 자바 섬에 이슬람 국가들이 팽창하면서 힌두교도들이 바로 옆 섬으로 건너왔기 때문이다. 힌두교도들은 발리에서 하나의 나라를 이루지 못하고 여러 개 작은 부족국가 형태로 나눠져 치고받고 싸웠다. 이중 동부의 크룽쿵, 남부의 멩위가 강자로 부상했다.

발리 섬은 지형적으로 플랜테이션 농업을 하기에 적합하지 않았다. 주민들은 노예무역과 아편 거래에 종사했다. 발리의 힌두들은 해양종족인 오랑라웃(Orang Laut)과 유대하며 전쟁 포로나 이웃 섬의 주민을 사로잡아 말레이반도의 말라카에 형성되어 있던 노예시장에 팔아 넘겼다. 네덜란드 동인도회사도 늦게까지 노예무역을 하면서 발리섬의 노예상과 협조 관계를 유지했다.

비교적 우호관계에 있던 네덜란드 식민당국과 발리 부족 사이에 틈이 생긴 것은 영국이 넘보면서였다. 19세기초 영국이 싱가포르를 건설한 이후 순다열도에 교역기지 건설을 시도했다. 그러자 네덜란드는 발리 섬의 지배권을 가질 계획을 갖게 되었다.

유럽에서 노예제 폐지운동이 번져나가면서 네덜란드 본국에서 노예제도를 금지했다. 1830년대에 식민지 당국도 본국의 지침에 따라 동인도(인도네시아)에서 노예 매매를 금지했다. 그동안 노예 거래로 생계를 이어가던 발리의 힌두교도들은 네덜란드의 조치에 격하게 반발했다.

바타비아 총독부는 발리섬의 대표주자 크룽쿵 왕국과 노예무역 방지를 위한 조약을 체결했다. 그럼에도 발리의 왕국들은 해상 노예포획을 위한 해상약탈을 중지하지 않았다. 조약이란 개념을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런 가운데 네덜란드는 현지왕국의 내정과 계승분쟁에 개입하고 나아가 종주권을 요구했다. 네덜란드와 힌두세력과의 마찰은 충돌을 불러 일으켰다.

네덜란드는 노예 매매를 중단한 이후 아편 거래에 집중했다. 노예보다 아편이 손쉬웠다. 이 무렵 마약류에 대한 규제는 거의 없었다. 식민당국이 아편 장사를 독점하려 하자 발리 왕들과 척을 지게 되었다. 결국 네덜란드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발리 섬에 무력을 투입했다.

 

1906년 바둥의 푸푸탄 후 시신. /위키피디아
1906년 바둥의 푸푸탄 후 시신. /위키피디아

 

1906914일 네덜란드 군대는 발리섬 동부 사누르 해변에 상륙했다. 920일 군대가 거의 저항을 받지 않고 케시만(Kesiman) 궁궐에 도착했을 때 왕과 그의 가족은 모두 자결한 상태였다. 네덜란드 군인들은 궁궐을 불태우고 덴파사르(Denpasar)로 갔다.(지금의 발리주 주도다)

군대가 궁궐 앞에 도착했을 때 내부에서 연기가 피어오르고 북소리가 들렸다. 그러더니 긴 행열이 나타났다. 라자()가 흰색 의례용 옷을 입고 장중한 보석을 치장한채 가마를 타고 대열 앞을 나왔다. 왕의 손에는 크리스(kris)라 불리는 호신용 칼이 들려 있었다. 신하와 경비원, 사제, 왕의 부인과 자녀, 하인들은 뒤를 따랐다. 그들은 모두 흰색 옷을 입고 죽음의 의례를 치른 상태였다.

왕은 네덜란드 군대에서 백보쯤 앞에 가마를 세우고 내렸다. 왕은 사제에게 신호를 보냈다. 사제는 크리스를 들고 왕의 가슴을 깊숙이 찔렀다. 뒤를 따르던 무리들은 스스로 자결하거나 상대방의 죽음을 도왔다. 주위에 있던 여인들은 꽃과 보물, 금을 던지며 죽음을 예찬했다.

이를 현지어로 푸푸탄(Puputan)이라고 부른다. 죽음을 위한 투쟁이란 뜻이라고 한다.

죽어가는 사람들에게 네덜란드 병사들은 기관총을 쏘아댔다. 궁궐 앞마당과 복도는 시체 더미로 변했다. 이날 몇 명이나 죽었는지 네덜란드측은 밝히지 않았으나, 여러 회고를 종합할 때 사망자가 1,000명에 이를 것으로 추정되었다. 그날 저녁 공동 통치자가 거주하는 페메쿠탄 궁궐에서도 비슷한 일이 벌어졌다.

네덜란드군이 타바난(Tabanan)으로 향하자, 그곳의 군주는 미리 항복하고 보호국을 자청했고, 발리섬의 종주국 격인 크룽쿵(Klungkung)도 네덜란드에 타협했다.

 

발리의 주도 덴파사르의 푸푸탄 상 /위키피디아
발리의 주도 덴파사르의 푸푸탄 상 /위키피디아

 

발리섬이 제압되었다고 판단한 네덜란드는 이번에 아편 거래를 금지시키고, 자기들의 마약상만 허용했다. 크룽쿵의 왕 데와아궁(Dewa Agung)은 이 조치에 격분해 자기 영토내 네덜란드 아편거래소를 공격해 폐쇄해 버렸다.

1908년 바타비아는 또 군대를 파견했다. 발리에 상륙한 네덜란드군은 무차별 학살을 감행한 이후 궁궐을 향했다. 418일 데와아궁은 가솔 200명을 거느리고 기다렸다. 네덜란드 변사가 왕을 사살했다. 그 옆에 있던 여섯 왕비들이 크리스를 빼들고 자결했다. 주변의 왕족과 신하들도 죽음을 선택했다. 네덜란드군은 크루쿵 왕궁을 불태우고 묻어 버렸다. 이로써 14~15세기에 대제국을 일군 마자파힛의 명맥이 끊어졌다.

그후 아직도 복속하지 않았던 발리의 부족들이 일제히 네덜란드에 복속했다. 두차례의 비극적인 푸푸탄을 거친 후에 발리섬은 온전하게 네덜란드의 식민영토가 되었다. 1910년 네덜란드는 순다열도 전체에 대한 식민화를 끝냈다고 선언했다.

 

발리 섬의 쿠타 해변 /위키피디아
발리 섬의 쿠타 해변 /위키피디아

 

네덜란드는 발리의 푸푸탄을 덮으려 했지만 언론을 통해 그 사실이 유럽에 전해졌다. 1920년대 네덜란드는 발리섬을 관광지로 개발했다. 그 이유는 두 가지였다. 푸푸탄의 잔학성에 대한 이미지를 덮으려는 게 첫 번째였고, 무슬림 원리주의자들로부터 힌두교도들을 보호하는 게 둘째였다.

발리섬은 많은 관광자원을 보유했다. 힌두교의 신비스런 문화를 유지하고 있고, 화산과 해변, 계단식 논은 이국적 아름다움을 느끼게 했다. 1차 대전이 끝난후 문명에 대한 염증을 해소하는 통로로 발리를 연상케 하는 관광상품이 만들어졌다. 유럽과 미국에서 발리섬으로 오는 크루즈 상품도 개발되었다. 당대 최고의 코미디언 찰리 채플린이 발리로 휴가를 갔고, 석유재벌 넬슨 록렐러도 신혼여행을 발리로 갔다.

발리인들은 어쩔수 없이 식민당국이 만들어 놓은 관광산업을 받아들이게 되었다. 오늘날 관광업은 발리 경제의 80%를 차지하며, 덕분에 발리 주는 인도네시아의 주() 가운데 가장 잘 사는 주로 꼽힌다.

 


<참고한 자료>

Wikipedia, History of Bali 

Wikipedia, Puputan 

Wikipedia, Dutch intervention in Bali (1906) 

Wikipedia, Dutch intervention in Bali (19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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